[신권발행 20년] 韓지폐, 쓰임은 줄고 가치는 커졌다

2006년 화폐 세대교체 시작…5000원권 신권 발행 20주년
5000원권 먼저 발행한 이유…'77246 위폐'가 촉발

(오른쪽)5000원, 1만원권 구권. (가운데) 1000원, 5000원, 1만원, 5만원권 신권. (왼쪽)대통령 사인이 들어간 신권. 이주희기자

2006년 1월 새 5000원권의 등장은 우리나라 화폐 역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1970년대 이후 큰 변화 없이 사용돼 온 은행권 체계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세대교체’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이듬해에는 1000원권과 1만원 신권이 동시에 발행되며 현행 은행권 체계가 완성됐고, 이후 5만원권까지 더해지며 한국의 화폐는 디자인과 기능, 보안 측면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신권 도입의 출발점은 위조와의 전쟁이었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화폐의 역할은 또 한 번 달라지고 있다. 현금 사용은 줄었지만 보유 규모는 오히려 늘어나는 역설적인 변화다. 화폐는 더 이상 일상 결제의 중심에 있진 않지만, 불확실한 시대의 안전자산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위조지폐, 20년 새 사실상 사라져

 

신권 발행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위조지폐 급증이었다. 2000년대 초반 급증한 구(舊) 5000원권 위조 문제는 발권당국의 적잖은 문제였다. 한국은행이 신권 발행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외형 변화가 아니라 신뢰 회복이었다.

 

한은 자료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적발된 국내 위조지폐 가운데 절반가량은 특정 기번호를 공유한 구 5000원권이었다. 이른바 ‘77246 위폐’로 불린 이 사건은 매우 많은 양이 위조지폐로 유통됐으며 신권 도입을 앞당기 계기 중 하나다.

 

전직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범인은 약 1년간 여러 종류의 화폐에 대해 위조지폐를 만드는 연습 끝에, 위조 방지 장치가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구 5000원권을 표적으로 삼았다. 컴퓨터와 프린터를 활용해 숨은 그림까지 흉내 냈고, 노인들이 운영하는 슈퍼마켓 등을 사전답사하는 등 범행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위조된 지폐는 약 5만장, 액수로는 2억5000만원에 달했다.

 

범행은 무려 8년간 이어졌다. 검거의 결정적 계기는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한 시민의 신고였다. 이 시민은 위조지폐의 기번호 일부를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나타난 범인이 건넨 지폐에서 같은 숫자 조합 ‘77246’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 사건은 위조 방지 기술뿐 아니라, 화폐 사용자 개개인의 관심과 신고가 화폐 신뢰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임을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김수영 한국은행 발권정책팀장은 “2006년 신권 발행을 앞두고 5000원권 위조 문제가 특히 심각했던 건 사실”이라며 “전체 화폐를 새 시리즈로 교체하는 계획은 이미 진행 중이었지만 위조 방지 측면에서 가장 시급했던 5000원권이 먼저 발행됐다”고 설명했다. 

 

신권 도입 효과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전체 위조지폐 발견량은 2006년 2만1941장에서 지난해에는 147장까지 감소하며 20년 만에 100분의 1수준으로 줄었다. 위조의 단골 표적이던 5000원권도 연간 수십장 수준으로 줄어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 화폐는 덜 쓰지만, 더 쌓아둔다

 

신권 발행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 화폐를 둘러싼 환경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고 있다. 카드와 모바일 결제, 간편결제가 일상화되며 ‘현금 없는 사회’가 거론되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현금 보유는 오히려 늘었다. 

 

우리나라 화폐 발행 잔액은 2004년 25조원에서 지난해 말 193조원까지 늘었고 올 11월 기준으로는 209조원을 넘어섰다. 20년 사이 약 8배 이상 증가했으며, 국민 1인당 약 400만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결제 수단으로서 현금 비중은 줄었지만, 보유 규모는 오히려 늘었다. 

 

김 팀장은 현금과 비현금 결제를 ‘대체 관계’ 아닌 ‘공존 관계’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금 유통 시스템이 탄탄해야 비현금 결제도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며 “정전이나 통신장애를 비롯해 전쟁, 재난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현금이 마지막 안전망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국가들은 급격한 캐시리스(Cashless·현금없는) 정책 이후 부작용을 경험하고 일정 수준의 현금 보유를 권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고 있다.

 

화폐의 변화 방향도 분명해지고 있다. 김 팀장은 “동전 사용은 확실히 줄었다”며 “인플레이션과 결제 환경 변화를 고려하면 ‘현금 없는 사회’라기보다는 ‘코인리스 사회’에 가깝다”고 말했다. 반면 지폐는 결제 수단을 넘어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역할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년간 화폐를 기술적으로 보면 위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까지 고도화됐고, 경제적으로는 쓰임새가 줄어든 대신 보유가치는 커진 것으로 해석된다.

 

현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쓰임과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신권 발행으로 화폐의 세대교체는 현행 은행권 체계를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현금의 역할과 의미는 시대 변화 속에서 계속 재정의 되고 있다. 

 

이주희 기자 jh224@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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