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IRP 해지 금지시켜야 퇴직연금시장 성장

김대환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인구 고령화 시대에서는 공적연금보다 퇴직연금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주요국은 인구 고령화로 인해 공적연금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자 퇴직연금제도를 통해 국민들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도록 유인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2005년 12월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했고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퇴직연금 적립금이 168조4000억원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는 과거 50년 동안 기대수명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늘어났고 지금도 급증하고 있다. 인간이 예상보다 오래 생존하게 되면 은퇴자산이 조기에 소진돼 버리는 장수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 장수 리스크를 관리하는 최적의 방법은 사망 시까지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하는 것이며, 연금이 바로 장수 리스크에 대항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이다. 

하지만 지금의 퇴직연금제도는 노후소득보장제도라기보다는 단순 저축상품으로 전락해 있다. 은퇴 시 퇴직연금 적립금을 연금으로 수령하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제도에 최소 10년 이상 가입해야 하고 55세 이상이어야 한다. 금융감독원의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한해 동안 연금수령 자격이 있는 사람 중 적립금을 연금으로 수령한 사람은 1.9%에 불과했다. 즉 98.1%는 적립금 전액을 일시금으로 수령했다는 의미다. 많은 연구기관에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일시금으로 수령한 적립금은 노후자산이 아닌 생활자금으로 조기 소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적립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연금수령과 일시금 수령 간 부담해야 할 세금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적립금을 연금으로 수령 시 제공되는 세제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세제체계의 개편보다 선행돼야 할 과제가 있다. 바로 적립금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다.

지난해 일시금으로 수령한 사람들의 평균 적립금은 1649만원에 불과한 반면 연금으로 수령한 사람들의 평균 적립금은 2억3000만원이다. 즉 현재의 세제체계 하에서도 적립금이 충분할 경우 자율적으로 연금을 수령하는 비중이 확대될 수 있다. 적립금의 규모가 확대될수록 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 수령하는 경향은 영국, 호주, 미국 등 주요국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소액의 적립금을 연금으로 수령할 경우 매달 수령하는 연금액이 미미하기 때문에 연금으로써 의미가 없다. 주요국도 소액의 적립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하도록 허용하고 세금도 면제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퇴직연금 적립금이 쌓이지 않는 것일까? 물론 우리나라 퇴직연금제도의 역사가 일천해 적립금이 충분히 쌓일 시간이 없었다. 또한 중소기업 근로자의 경우 임금 수준이 높지 않기 적립금이 많지 않을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퇴직연금제도 자체에 있다. 바로 개인형 퇴직연금(IRP)이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IRP는 이직자가 기존 사업장에서 축적한 적립금들을 한곳으로 모아 은퇴자산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이를 퇴직연금제도의 연속성 또는 적립금의 통산성이라 하는데, 평균 근속기간이 6년 정도에 불과한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는 IRP가 퇴직연금제도의 꽃이다. 정부 역시 IRP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개정해 이직 시 이전 사업장에서의 적립금을 IRP로 이전하도록 의무화했다. 

문제는 적립금을 IRP로 이전한 이후 해지하더라도 패널티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IRP로 적립금을 이전한 사람은 78만8000명이며 해지자는 74만명일 정도로 대부분 이직자가 IRP를 해지하고 있다. 

퇴직연금제도를 운영하는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이직을 핑계로 은퇴자금을 전액 인출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건강 악화나 주택 구매 등의 이유로 적립금을 중도에 인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직 후 IRP를 해지하는 것만큼은 하루빨리 금지해야 한다. 일시금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맛봐온 국민들의 반발이 있겠지만 정부는 부모의 마음으로 사탕을 뺏어야 한다. 퇴직연금제도를 진정한 노후소득보장제도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방안은 IRP의 해지를 금지하는 것 말고는 백약이 무효다.  

<김대환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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