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보고서는 기업의 회계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서 공인회계사가 그 적정성 여부를 알려주는 문서다. 하지만 감사보고서라는 단어만 보더라도 누가 이것을 흥미롭게 여길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러 해의 감사보고서를 나란히 펼쳐 놓으면 특정 회사의 의사결정자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어 꽤 흥미롭다.
필자가 애정하는 제품이자 응원하는 기업이 하나 있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소주 회사라고만 언급하겠다. 필자가 처음 이 소주를 접한 2005년의 매출액은 185억원이었다. 2025년도의 경우 213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고, 약간의 오르고 내림은 있지만 200억원 초중반의 매출을 보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매출 215억원에 영업이익 15억원, 당기순이익 11억원이며 은행 빚은 단기차입금 38억원이 전부였다. 기계장치는 취득원가 129억원 중 116억원이 이미 감가상각돼 장부에는 13억원만 남아 있었다. 이대로 버티면 매년 10억원 남짓의 이익을 쌓으며 알토란 같은 회사를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다른 길을 택했다. 감사보고서의 ‘건설중인자산’ 계정을 따라가 보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간 227억원이 차곡차곡 쌓인 뒤 2018년 한꺼번에 건물과 기계장치로 옮겨간다. 장부상 건물은 25억원에서 99억원으로, 기계장치는 136억원에서 176억원으로 늘었다. 연 매출에 맞먹는 돈을 공장에 쏟아부은 것이다. 흔히 말하는 시설투자다. 매년 발생하는 이익을 배당이나 급여 등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 회사는 제조기반을 확충하고 고도화하는 데 사용했다.
시설투자금의 대부분은 은행에서 왔다. 38억원이던 차입금은 2018년 말 251억원으로 불어났고, 그 대부분은 시설자금대출이었다. 이러한 결정의 청구서는 손익계산서에 고스란히 찍혔다. 새 공장이 가동된 2018년부터 이 회사는 적자와 흑자를 오가기 시작했고, 지난해엔 213억원의 매출을 일으켜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2016년과 비교해 보면 이유가 보인다. 기계장치 감가상각비는 연 4억원대에서 12억원으로, 건물 감가상각비는 1억원에서 3억원 가까이로 늘었다. 이자비용도 연 2억원에서 8억원으로 뛰었다. 장사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시설투자로 인한 감가상각비와 그 공장을 짓느라 빌린 돈의 이자가 이익을 고스란히 가져간 것이다.
여기서 감가상각비의 성격을 짚어보자. 감가상각비는 이미 지급한 설비 대금을 쓰는 기간에 걸쳐 나눠 비용으로 떨어뜨리는 것일 뿐, 올해 현금이 나가는 비용이 아니다. 그리고 비용에는 끝이 있다. 2018년에 들어온 새 기계의 내용연수는 10~12년이고, 지난해 말 기계장치의 남은 장부가액은 61억원이다. 지금 속도라면 4~5년 안팎이면 상당 부분이 끝난다. 2016년의 이 회사가 그랬듯 상각이 끝난 설비는 비용 없이 이익을 낸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기계장치 감가상각비만 사라져도 2016년 이상의 영업이익이 꼬박꼬박 발생하는 단단한 기업이 된다.
현금은 이미 돌고 있었다. 2025년에도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18억원 플러스였고, 회사는 이 현금으로 이자를 내고 설비를 손보면서 차입금을 2018년 말 251억원에서 2025년 말 190억원으로 60억원 넘게 줄였다. 2025년에는 그동안 매년 ‘1년 안에 갚아야 할 돈’으로 분류되던 90억원대 차입금이 장기대출로 바뀌었다. 은행도 이 회사의 다음 몇 년을 믿어주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리고 이 현금은 회사 안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이 회사가 지급한 급여, 퇴직급여, 복리후생비를 합하면 약 46억원이다. 대부분 제주에서 일하고 제주에서 소비하는 사람들의 생활비가 됐을 것이다. 차입금의 약 3분의 2는 이 지역 은행에서 빌렸으니, 이자 역시 지역 금융으로 돌아간다. 원재료를 사고, 병을 실어 나르고, 공장을 수리하는 모든 과정에서 돈이 지역 안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회사로 들어온다. 반세기 넘게 한 자리에서 물건을 만들어온 제조공장이 갖는 의미는 재무제표 숫자 이상이다. 이 회사가 만드는 소주를 계속 즐길 수 있게 필자와 이 회사의 건강 모두를 기원한다.
<회계법인 브릿지 공인회계사 최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