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 페스트가 일으킨 공전의 호황

14세기 유럽, 페스트 유행해 수백만 사망…인구 수 부족에 실질임금 급등
노동자 소득 증대로 대호황 발생…기근에도 평민 식탁까지 고기로 메워져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를 치료하던 의사의 복장. 14세기에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케 한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재앙 후 줄어든 인구 수 덕에 공전의 호황이 찾아오게 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현재 대한민국은 체감 청년실업률이 약 25%에 달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10~20년쯤 지나면 청년실업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란 분석이 존재한다. 그 때 즈음에는 청년의 숫자 자체가 대폭 감소해 구직자 대비 일자리 수가 충분하므로 실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 역사에는 전쟁, 전염병 등으로 인구 수가 급감한 뒤 실업률 문제가 해결되고 근로자의 소득이 증가하는 현상이 종종 발생했다.

페스트(흑사병) 유행 후 공전의 호황을 만끽한 14세기 유럽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구직자 수 급감하자 실질임금 6배 급등

중세는 흔히 ‘암흑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확실히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 사회의 양상은 절망적이었다.

농업 생산력은 급감하고 물류의 유통은 끊겼다. 소규모 영주들끼리의 전쟁이 끊이지 않아 사회가 불안정했다. 이슬람 해적까지 날뛰면서 평민들의 삶은 비참한 수준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 시대의 풍요로움과 활력, 그리고 지성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계승한 르네상스 시대가 개막하기 전까지의 중세가 전부 암흑 시대였던 것은 아니다. 서기 100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정치가 안정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유럽이 사회경제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다.

특히 14세기 공전의 호황은 어마어마했다. 이 때 유럽 경제의 급성장은 훗날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젖히는 원동력으로까지 작용한다.

서기 1350년대 서유럽은 온통 공포로 휩싸였다. 페스트가 전 유럽에 돌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 때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페스트로 인해 죽었다. 모두가 공포에 떨어 길거리에 인적이 끊겼다.

하지만 페스트가 불행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의술 발전의 계기가 됐다. 또 십자군 원정 실패 후 흔들리던 로마 교회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자유로운 사상의 발전에 일조했다.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점은 페스트가 가라앉은 뒤 서유럽에 경이로운 호황이 불어닥친 것이다.

페스트 때문에 유럽 인구 수가 3분의 2로 크게 줄었다. 덕분에 구직자 수에 비해 일자리가 넘쳐흐르는, 현대의 한국이 보기에는 너무나 부러운 상황이 연출됐다.

농민들은 소작을 쉽게 얻었으며 구직자 모두가 취직했다. 실업률이 바닥으로 내려가자 사회에 활기가 돌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 수가 부족하자 대지주, 대상인 등은 우수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앞다퉈 임금을 올리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실질 임금 페스트 유행 전보다 6배 이상으로 급등하고 일개 농노조차 과거보다 훨씬 관대한 처우를 받았다.

귀족과 자본가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인력이 유출될까 겁난 나머지 그들의 소득과 복지를 상당히 배려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작농 집단이 대지주 귀족에게 큰 소리를 땅땅 치는 광경까지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소작농, 근로자 등 저소득층의 소득이 급증하자 서민들의 삶이 예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풍요로워졌다.

검은 빵과 밀가루죽뿐이던, 소금에 절인 고기라도 매우 드물게 먹을 수 있던 서민들의 식탁이 하얀 빵과 고기로 채워졌다. 이전에는 사치품이던 하얀 빵과 신선한 고기를 이제는 하층민들도 실컷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비가 활성화되자 자연히 이들에게 필요한 물산을 공급하는 상공업도 점점 더 발달했다. 경제 호황에 신난 자본가들은 정부의 독촉 없이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이는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작농과 근로자의 수입을 더 크게 늘리는 선순환으로 작용했다.

당시 유럽의 역사 기록 중 “사방에 고기가 넘쳐난다. 기근에도 다들 고기를 먹고 있다”는 다소 황당한 문구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도 먹을 것 걱정은 커녕 평민들까지 고기를 실컷 먹고 있었던 것이다. 

길거리의 여관들은 매일 여러 마리의 소와 돼지를 도살했다. 식사 시간에 식당으로 내려가면 마치 뷔페처럼 온갖 종류의 고기와 채소 등 음식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손님들은 이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었다.

축제라도 벌어지면 더 호화판이다. 누구나 집 문을 활짝 열었다. 그들은 길 가는 아무나 붙잡아 햄, 새끼양, 거위 등 호화로운 음식들을 대접했다.

상업 발달 덕에 당시 유럽에서 제일 경제력이 강하던 네덜란드 지방에서는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천대했다. 그들은 사슴고기와 자고새 고기 등을 찾아먹으면서 자신들의 부를 과시했다.

15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호황 덕에 평민들이 생활이 몹시 풍요로워지자 향락 산업도 발달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사회에 지나친 사치와 향락이 만연하고 있다”며 비판의 붓을 휘두르기도 했다.

◇인구 수 회복되자 호황 종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대호황은 흑사병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지고 유럽의 인구가 회복되면서 가라앉기 시작한다.

다시금 구직자 수 대비 일자리 부족이 대두되면서 실업률이 상승했다. 더 이상 인력 유출 고민을 하지 않게 된 귀족과 자본가들은 휘하의 소작농 및 근로자에 대한 처우를 악화시켰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뚝 떨어지자 자연히 소비도 부진해졌다. 소비가 부진하니 자본가들은 투자를 꺼리게 되고 그동안 고용하던 노동자들까지 해고했다. 경제의 활력은 눈에 띄게 저하됐다.

르네상스 시기는 문화와 지성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로 유명하다. 중세 말기의 대호황은 경제력을 크게 끌어올렸으며 삶이 윤택해진 사람들은 예술로 눈길을 돌렸다.

예술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자 시인, 화가, 조각가 등이 맹활약을 했다. 교회의 권위가 약해진 점까지 영향을 미쳐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가, 그리고 그들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풍조가 부활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르네상스 시기의 경기는 도리어 중세 말기보다 못했다. 그간 쌓아둔 부 덕분에 부유층은 여전히 잘 살았지만 평민들의 삶은 크게 추락했다. 이제 평민들의 식탁에서 흰 빵과 고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1518년경 브루타뉴의 한 늙은 농민은 "옛날에는 축제 기간이면 마을의 누군가가 사람들을 불러 닭, 돼지, 소고기 등을 대접했었는데 요새는 그런 풍토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16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불황의 파도는 더 심해졌다. 더 이상 르네상스 초기처럼 작은 도시국가만으로는 생존이 힘들어지자 여기저기서 도시와 영지 간 분쟁 및 병합이 발생했다.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는 거대한 인구와 영토를 거느린 영토형 대국이 탄생했다. 이탈리아 반도도 대형 도시국가 몇 곳으로 정리됐다. 이는 훗날 절대왕정 시대로 연결되는 시발점이 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불황의 수레바퀴가 멈추고 재차 호황이 찾아온 것은 또 다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은 뒤였다.

위그노 전쟁과 30년 전쟁으로 유럽이 쑥대밭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아사하자 비로소 실업률이 하락했다.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도 상승하면서 경기가 호전되기 시작한다.

융성한 경제는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강력한 절대왕정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인구 수가 회복되자마자 거짓말처럼 또 불황이 닥쳐왔다. 불황의 파도는 유럽인들을 전투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국왕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연결된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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