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 포기한 이유는?

레판토 해전 패배 후 해군 재건에 재정 소모
예산 부족으로 수에즈 운하 건설 계획 폐기

1869년 건설된 수에즈 운하. 오스만 터키 제국은 이에 앞서 16세기에 수에즈 운하 건설을 계획했으나 레판토 해전 패배 때문에 계획이 폐기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오스만 터키 제국은 서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뒤 욱일승천의 기세로 영토를 확장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세 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차 비엔나 포위 실패로 판노니아 지방을 손에 넣지 못하면서 제국의 성장세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정체 상태로 흐르던 오스만 제국은 경제력 반등을 위해 수에즈 운하 건설을 꾀했다.

하지만 레판토 해전 패배 후 해군 재건에 예산을 쏟아 붓느라 재정절벽에 부딪히면서 운하 건설은 종이 위의 계획으로 남게 된다.

◇레판토 해전서 제국 함대 궤멸

1571년 벌어진 레판토 해전은 기실 그 전년도의 키프로스 침공으로부터 비롯됐다.

중근동 해안에 근접한 키프로스 섬은 동지중해 교역의 주요 중계 기지이자 포도 산지로서 번성하고 있었다. 그 부를 탐낸 오스만 제국은 1570년 키프로스 섬을 공략했다.

당시 키프로스 섬의 지배자였던 베네치아는 물론 격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이미 전성기가 지난 베네치아는 홀로 거대 제국에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교황 피우스 5세를 끌어들여 ‘성전’을 선포하도록 유도했다.

피우스 5세가 외치는 성전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시큰둥했지만 알제리 병합을 노리던 스페인은 끼어들었다. 이리하여 베네치아와 스페인 및 로마 교황청이 힘을 합친 신성 동맹이 1571년 발족했다. 총사령관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의붓동생인 오스트리아 공 돈 후안이 맡았다.

세 나라는 약 200척(베네치아 110척, 스페인 75척, 교황청 23척 등)의 대함대를 결성해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키프로스 구원을 원하는 베네치아와 달리 스페인은 북아프리카 공략을 우선해 양측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 해 여름이 다 가도록 함대가 전진하지 못하는 사이 오스만 제국은 착실히 키프로스 섬을 공략했다. 마침내 1571년 8월 마지막 베네치아군 거점인 파마구스타가 함락되면서 키프로스 섬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됐다.

그 소식을 듣자 원통함을 견디다 못한 신성 동맹 장병들은 서로의 대립을 잠시 접어둔 채 일단 동쪽으로 항해했다. 공략 목표는 지역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 함대 자체로 잡았다.

코린트만의 파트라스에 정박해 있던 오스만 함대도 서유럽 함대의 접근 소식을 듣고는 출진했다. 그들 역시 신성 동맹 함대와 비슷한 약 200척 규모였으며 총사령관은 알리 파샤였다.

양군은 레판토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치열한 전투는 신성 동맹의 압승으로 끝났다. 제국의 함대 중 50여척이 침몰되거나 불탔으며 117척이 나포됐다. 신성 동맹의 손실은 갤리선 12척에 그쳤다.

특히 베네치아의 신형 함선 갈레아차의 활약이 눈부셨다. 다른 배와 달리 수십 문의 대포를 설치한 갈레아차는 선봉에서 맹포격으로 오스만 함대의 예봉을 꺾었다.

◇ 참패의 후유증…폐기된 수에즈 운하 건설 계획

레판토 해전은 지중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으며 서유럽이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을 막아낸 일대 승리로 유명하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레판토 해전이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돈좌시킨 것은 아니었다. 신성 동맹은 대승으로 기뻐했으나 결국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의견 충돌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함대는 더 이상 동지중해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이제 오스만 제국 영토가 된 키프로스 섬은 전혀 위협받지 않았다. 결국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섬을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과 강화를 맺는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17세기에 다시 ‘지중해의 항공모함’으로 일컬어지는 크레타 섬까지 점령했다. 발칸 반도에 베네치아가 건설한 항구도시들도 대부분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베네치아는 속절없이 밀리기만 했다.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에서 완연한 하락기로 접어든 것은 18세기에 접어든 후의 일이었다.

다만 레판토 해전은 지중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스만 제국의 성쇠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은 수에즈 운하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시기 수익성이 제일 높은 산업은 향신료 교역이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동지중해를 장악한 뒤 향신료 교역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까지 직접 닿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양상이 바뀌었다. 포르투갈이 향신료 교역을 사실상 독점함에 따라 기존의 동지중해 교역로는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비상이 걸린 오스만 제국은 홍해와 인도양에서 포르투갈과 맞서 싸웠으나 연전연패만 기록했다. 디우 공방전, 호르무즈 공방전 등에서 모두 패배하자 제국의 재상 소콜루는 수에즈 운하 건설을 검토했다.

당시 제국의 주력 함대가 지중해에 주둔한 것과 달리 홍해 쪽은 해상 전력이 훨씬 약했다. 소콜루는 수에즈에 운하를 뚫은 뒤 지중해의 함대를 홍해로 옮겨 포르투갈 해군을 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풀렸다면 오스만 제국이 다시금 향신료 교역을 독점해 국가 경제력이 크게 향상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의 참패로 수에즈 운하 건설 계획은 서류상의 계획으로 끝나게 된다.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동지중해의 해상 전력 대부분이 증발한 제국은 해군 재건에 몰두했다. 이대로 신성 동맹 함대가 몰려오면 수도 이스탄불까지 위기에 처할 수 있었던 터라 제국 정부는 필사적이었다.

국가의 총력을 쏟은 덕에 효과는 훌륭했다. 1571년에서 1572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만 100척 가까운 갤리선이 건조되는 등 오스만 제국은 금세 막강한 해군력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해군 총사령관이 된 울루지 알리는 교묘하게 결전을 피하면서 신성 동맹의 해체를 기다렸다. 그가 꿰뚫어본 대로 베네치아와 스페인은 오래 손잡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신성 동맹이 해체된 뒤 동지중해의 제해권은 다시 제국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하지만 해군 재건에는 큰 돈이 들어간다. 무려 200척이 넘는 함대를 새롭게 만드느라 오스만 제국은 예산을 모조리 써야 했다. 재정절벽에 부딪힌 제국에는 더 이상 운하 건설같은 대사업을 일으킬 돈이 없었다.

수에즈 운하 건설 계획이 폐기된 탓에 홍해 및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의 우위는 확고해졌다. 판노니아 평원 점령에 실패하고 향신료 교역에서도 소외된 오스만 제국은 경제력이 점차 쇠퇴하면서 완만한 하락세를 그리게 된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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