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요?] '은행高試' 부활? 번지수 잘못 찾은 대책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규준' 시대역행 필기시험 재도입
'시험형 인재' 양산 우려…"은행 취업 문턱 더 높아져"

 하루에도 수많은 제품들이 쏟아지고 갖가지 서비스가 등장합니다. 정부 정책도 연일 발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소비자와 국민들을 겨냥한 이들 제품과 서비스, 정책이 정말 유용하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정확히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계파이낸스는 기존 사용후기식 제품 비교에서 벗어나 제3자 입장에서 냉정하게 분석하고 평가해보는 새로운 형태의 리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의 [그래서요?] 시리즈를 통해 제품·서비스·정책의 실효성과 문제점 등을 심층 진단합니다. <편집자주>

채용비리로 홍역을 앓고 있는 은행권이 이른바 '은행 고시(高試)'로 불리는 필기시험을 다시 도입할 방침입니다. 그간 은행권에서 합격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지원자가 고위임직원이나 정치권 및 금융감독기관의 '추천'을 받아 합격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객관성을 높인 채용방식이라며 내놓은 대책입니다.

필기시험 부활은 채용비리 근절책 중 하나입니다. 전국은행연합회는 지난달 필기시험 실시와 면접관에 외부인사 참여 등을 골자로 한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규준' 초안을 마련해 금융당국에 전달했습니다. 모범규준은 권고사항이라지만 초안이 최종 확정되면 기 시행 은행들을 포함해 사실상 전 은행에서 필기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필기시험은 시대에 뒤떨어진 조치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핀테크,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등이 화두로 떠오른 급변하는 산업환경 속에서 필기시험에 최적화된 인재를 뽑는 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거셉니다. 필기시험이 사실상 당락을 좌우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은행권 취업준비생들의 시름도 깊어지게 됐습니다. 세계파이낸스는 은행권 필기시험 부활의 한계와 문제점을 들여다봤습니다.

◇ '줄세우기'식 채용 불가피

은행권을 휩쓴 채용비리 사태는 최고경영자의 거취에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그 여파가 컸습니다.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과 박인규 전 DGB금융지주 회장겸 대구은행장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도 과거 하나금융지주 재직 시절 행적에 책임을 지고 직에서 내려왔습니다. 

함영주 하나은행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지만 수사는 계속될 전망입니다.  함 행장이 불구속 기소되더라도 재판에서 업무방해 또는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죄가 확정되면 행장직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올해 3월 이후 차례로 진행된 KEB하나은행과 신한금융지주의 채용비리 조사에서도 비리가 드러났습니다. 금융사 임원이나 정치권 관계자 등이 관여한 지원자가 자질 미달에도 불구 최종합격한 것인데요.

채용과정에서 여성을 차별한 정황도 밝혀졌습니다. 한 예로 하나은행은 지난 2013년 하반기 신입행원 채용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채용비율을 4대 1 비율로 차등 채용하기로 사전에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당시 남성지원자의 서류전형 커트라인(419점, 600점 만점)으로 여성 지원자(467점)보다 낮았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행위입니다. 금융감독원 하나금융 채용비리특별검사단 측은 "남녀차별없이 채용을 진행했다면 서류전형 합격비율이 남성과 여성이 1대 1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은행권의 필기시험 부활은 이 같은 병폐를 바로잡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으로 보입니다. 어찌보면 객관성과 형평성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춘 건데요. 이미 마련된 채용절차 모범규준이 이달 중 최종확정되면 은행 채용 프로세스에 곧바로 적용됩니다. 은행권 관계자들은 "가이드라인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모든 은행이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이라며 필기시험 부활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필기시험은 점수순으로 인재를 걸러내 주관적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적습니다. 하지만 객관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인재 채용방식을 획일화했다는지적이 큽니다. 은행들이 과거 필기시험을 줄줄이 폐지했을 때 "성적 중심의 채용에서 벗어나 다양한 채용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강조했던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실제로 채용비리로 은행장이 물러났던 우리은행은 올해 상반기 신입행원 채용에서 11년 만에 필기시험을 재도입했습니다.

은행권에서도 자조섞인 목소리가 나옵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필기시험이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채용방식인 건 분명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채용방식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시험에만 특화된 이들만이 좁은 은행 채용문을 통과할 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같은 맥락에서 'SKY대학'위주의 인재쏠림 현상이 심화할 거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민환 인하대 글로벌금융학과 교수는 "공기업의 예를 살펴보니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블라인드면접에서 오히려 '스카이출신'의 집중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며 민간 영역인 은행에서 필기시험을 도입하는 데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습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채용왜곡현상을 막기 위해선 공정성과 형평성의 딜레마가 존재하더라도 지역적 안배 등의 가치를 보다 중시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습니다

필기시험이 정량적 평가에 초점을 맞춘 인재 채용방식이라는 점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핀테크업계의 한 인사는 "전 세계가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은행권의 필기시험 강화 움직임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은행 밖으로 잠시 눈을 돌려볼까요? 국내 주요 기업들에선 다양한 채용방식을 속속 도입하고 있어 은행권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국내 대기업인 A그룹은 연락처와 직무 관련 기획서만 받은 후 직무별 주제와 관련한 프레젠테이션(PT)을 통해 인재를 뽑고 있습니다. 직무능력과 무관한 자격증, 수상경력 등은 입사지원서 양식에서 아예 빼버렸다는군요. B그룹은 해외 네트워크를 강화하고자 글로벌 인재 모집전형만을 따로 진행하기도 합니다.

◇난이도 높아지나? 부담커진 취준생

은행권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은 필기시험 부활 소식이 반가울 리 없습니다. 높은 수준의 외국어 실력과 각종 금융자격증을 갖춰도 평균 50대 1의 경쟁률을 웃도는 은행권에 취업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벌써부터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선 필기시험 강화가 결국 은행 취업의 문턱만 높일 거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한 지방은행 관계자는 "필기시험이 부활할 경우 은행으로서는 이를 외부기관에 맡겨 필기시험 절차를 진행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를 준비하는 지원자들의 부담은 이전보다도 심화할 것이어서 안쓰러운 심정"이라면서 시험에만 특화된 지원자를 뽑는 게 능사는 아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특히 모든 은행이 필기시험을 인재채용의 중요한 잣대로 활용하게 되면 필기시험의 난이도 역시 높아질 공산이 큽니다. 필기시험의 난이도가 은행권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질 것으로 보는 의견도 많습니다. 이래저래 은행권의 문을 두드리는 취업준비생들의 고민도 커질 것 같은데요. 

"문제유형이 생소해 당황스러웠다. 금융권 입사를 위해 준비한 금융자격증보다도 난이도가 훨씬 높았다." 지난 4월 우리은행에서 필기시험을 봤던 한 취업준비생의 말입니다. 상반기 채용절차를 진행한 은행 중에선 언어·연상·수리·범주화·시각·논리문제 등이 출제된 우리은행의 필기시험이 기업은행의 직무지식시험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웠다는 후문입니다.

결국 은행고시의 부활은 시험에 최적화된 인재를 뽑는 구시대적 채용방식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은행권에선 십 수 년 전 필기시험을 폐지한 후, 자체적인 채용절차를 통해 각 은행에 적합한 인재 선별 노하우를 쌓아왔었는데요. 이 같은 내부 역량까지도 묻힐 공산이 큽니다. 신입행원 채용 과정에서 은행의 재량권이 크게 줄어들 게 되는 셈입니다. 

벌써부터 필기시험 강화방안을 두고 "이렇게 (필기시험 강화)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시중은행의 또 다른 관계자)"라거나 "일단 몇 번 정도 시험을 치러봐야 알겠죠(올해 상반기 은행 취업준비생)"라는 식의 푸념이 나오고 있습니다.

◇ 부정채용 막을 제도보완이 핵심

필기시험 부활이 채용비리 척결을 담보할 수 있느냐도 의문입니다. 시험 결과를 조작해버리면 필기시험 도입의 의미가 무용지물이 돼버립니다. 은행권 채용비리에는 필기시험 점수를 조작한 사례도 있었으니까요. 한 예로 대구지검에 따르면 대구은행은 필기시험 탈락자의 면접점수를 올리거나 점수를 바꿔치기하는 방법으로 성적을 조작했습니다.

이렇다보니 필기시험 강화가 채용비리 사태의 해결을 위한 대책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면접전형은 잘못됐고 필기시험은 능사라는 식의 생각 자체가 문제"라면서 "점수조작 등 채용비리를 걸러낼 내부통제시스템 마련, 비리 연루자 책임 추궁 강화 등의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국회에선 채용비리 연루자에 대한 처벌을 높이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습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 외 11명의 의원이 지난달 내놓은 일명 '채용비리 근절3법'이 그것인데요.

대표적인 게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입니다. 채용비리와 연루된 금융회사의 직원의 경우 임원 결격사유의 요건으로 명시했습니다. 또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개정안에서 채용비리에 의해 합격됐을 경우 해당 채용을 취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심 의원실 측은 "공정하지 못한 경영은 시장경제 차원에서도 부합하지 않는다. 청년들의 성실한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도록 공정한 채용과정을 도입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금융공기업 관계자는 "최고경영자에서부터 말단 인사부서 직원을 대상으로 한 직업윤리교육을 강화해아 한다"면서도 "인사책임자가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한계"라고 언급했습니다. 조남희 대표는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호 조치를 강화하는 것도 채용비리 근절책의 한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입니다. 은행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채용 부정을 차단할 최적의 시스템이 어떠한 것인지 은행권의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현승 기자 hs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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