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돈 때문에 벌어진 프랑스 대혁명

美 독립전쟁 참전으로 재정 고갈된 프랑스…삼부회 열어 증세 논의

성직자·귀족, 부르주아 계층에만 세금 전가…부르주아, 시민 선동해 혁명 발발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 사실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 등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난 혁명이 아니었다. 진짜 원인은 누가 세금을 낼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프랑스 특권 계급과 시민 계급 사이의 다툼이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등의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확히는 돈이라 불리는 종이쪽지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프랑스 대혁명’은 근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사건으로 유명하다. 대혁명의 파도가 전 유럽을 휩쓸면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퍼지고 이를 통해 왕정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후 유럽은 프랑스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정으로 전환됐다. 아직 영국, 스페인, 스웨덴 등에는 왕이 존재하지만 절대권력자라기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또한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 민주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민주정이 아닌 국가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토록 거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은 프랑스 시민들이 민주적인 가치를 원해서였을까? 왕을 상대로 참정권을 요구하면서 혁명이 일어난 걸까?

그렇지 않았다.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언제나 돈이었다. 참정권은 오히려 권력자가 나에게 신체적 및 경제적인 피해를 입히는 걸 막고자 하는 방패의 의미가 더 컸지, 참정권 자체가 목적인 적은 별로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자유, 평등, 박애 등 고귀한 말은 단지 겉포장으로 붙인 수사일 뿐이었다. 실제 원인은 ‘돈’이었다.

◇175년만에 열린 삼부회…혁명으로 연결돼 

서기 1780년대 후반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왕의 사치 때문은 아니었다. 거꾸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부처는 태양왕 루이 14세 등 전대 국왕들보다 훨씬 검소한 생활을 했다. 루이 16세 본인이 화려함에 별로 관심이 없을 뿐더러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도 사치와 인연이 없었다.

본국 오스트리아에서 검약한 생활 풍조를 배워온 그녀는 오히려 프랑스 궁정의 사치스러운 풍조를 고치려 애썼다. 당시 호화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프랑스 귀부인들이 “저렇게 볼품없이 꾸미고 다니는 여자가 무슨 왕비냐”고 뒷담화를 할 정도였다.

참고로 마리 앙트와네트가 사치가 심했다든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입에 담았다든지 하는 루머는 모두 거짓말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하려고 꾸며낸 헛소문이었다.

프랑스의 재정이 위기에 처한 주된 이유는 무리한 미국 독립 전쟁 참전 때문이었다. 1775년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에서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단지 앙숙인 영국을 골탕먹이려고 전쟁에 참여했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해준 데다 수만 군대를 아메리카에 파견해 여러 해 동안 같이 싸운 프랑스군은 미국군에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1781년 체서피크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을 격파한 승리가 독립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첨언하자면 해군이 강하기로 유명한 영국이 프랑스에게 해전에서 이렇게 대패한 것은 이 전투가 유일무이했다.

다만 이 참전이 영국에게 거대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날리는 손해를 안긴 동시에 프랑스의 재정에도 심대한 타격을 안겼다. 몇 년간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느라 국고가 텅텅 비어버린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거액의 국채까지 발행했는데 이 채권의 이자를 갚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프랑스 국고에 금화가 없다는 소문이 돌면서 새롭게 국채를 발행해도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증세뿐이었다.

루이 16세는 고심 끝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시민의 세 계급이 모인 회의로 본래 프랑스 왕의 결정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어용 의회였다.

1614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대립이 심해지자 최초로 삼부회를 열어 어용으로나마 지지를 획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교황을 납치해 아비뇽에 가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다.

이 삼부회가 175년만인 1789년에 다시 열린 것이다. 다만 주제는 그 때와 달리 교황 연금이 아니라 증세였다.

당시 프랑스의 1계급인 성직자와 2계급인 귀족들은 ‘면세 계층’이라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가난한 시민들은 세금을 낼 돈이 없다. 즉, 프랑스의 재정은 주로 3계급인 시민들 중에서도 상인, 변호사, 의사 등 부유한 시민을 통칭하는 부르주아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재무장관 네케르는 부르주아들을 더 쥐어짜기보다는 기존의 면세 계층인 성직자와 귀족에게서 새로운 세금을 거두고 싶어 했다. 그가 도덕적인 관료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반발을 최소화하는 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삼부회에 참석하는 의원 수도 3계급 수를 1계급 및 2계급을 합친 수와 비슷하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삼부회가 네케르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세금을 내기 싫은 성직자와 귀족은 서로 결탁해서 머릿수대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별로 1표씩 행사하도록 제도를 정했다.

결국 성직자와 귀족의 면세 특권은 그대로 유지하되 부르주아들의 세금만 늘리도록 결론이 나왔다. 당연히 부르주아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미라보를 중심으로 따로 모여 1789년 7월초 ‘헌법 제정의회’를 만들었다. 부르주아들은 영국과 비슷하게 헌법을 만들어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왕과 귀족 및 그들이 가진 무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가난한 시민, ‘상 퀼로트’들을 선동했다. 왕과 귀족의 사치를 악의적으로 과장해서 알리고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워 “우리의 권리를 위해 총을 들고 일어서자”고 외쳤다.

가난한 민중은 언제나 권력자를 싫어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시기 프랑스 정부의 재정 악화로 국가경제가 흔들리면서 서민들의 삶은 더 비참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그럴 듯한 선동의 바람이 불어넣어지자 곧장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특히 평민층에 우호적인 관료로 유명한 네케르의 파면이 그들의 봉기에 불을 붙였다.

재정 부족으로 프랑스의 군사력이 약해진 데다 자국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게 양심에 걸렸던 루이 16세와 군사령관들이 미온적으로 대처한 부분이 겹쳐지면서 혁명의 물결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대성공을 거뒀다.

7월 14일 약 1만명의 무장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성을 습격했다. 주로 정치범을 잡아가두는 감옥 역할을 해 악명 높은 바스티유 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장병들은 학살당했다.

이어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벌어졌다. 프랑스는 대혼란에 빠졌다. 루이 16세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헌법 제정의회에 모든 권력을 넘겼으며 의회는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의 폐지를 선언했다. 권력을 내려놓더라도 이쯤에서 프랑스인끼리 죽고 죽이는 참사만은 멈추자는 것이 루이 16세의 생각이었다.

◇브레이크 걸리지 않는 혁명…루이 16세 처형

사실 부르주아들은 이쯤에서 멈추고 싶어 했다. 그들은 증세에 반대했을 뿐 왕정을 폐지할 목적은 없었다. 그저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물리고 자신들이 권력을 쥐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부르주아들이 가난한 시민들에게 권력을 나눠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실제로는 그들을 경멸하고 있었다는 것은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으로 증명된다. 당시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총재 정부와 국민 공회는 파리에서 3만명의 무장한 ‘상 퀼로트’가 봉기를 일으키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진압을 맡겼다.

나폴레옹은 시민군과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무자비하게 대포를 쏘아 갈겼다. 무장이 약한 시민군은 곧 흩어지고 주모자들은 체포돼 처형당했다. 오히려 왕이나 귀족들보다 부르주아들이 시민들을 더 잔인하게 탄압한 것이었다. 이후 정부는 ‘국민방위군 제도’를 폐지해 시민들로부터 무력을 빼앗았다.

시민과 대화하기보다 대포로 강경 진압하고 나아가 시민들의 무장을 해체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행태. 그것이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건 프랑스 총재 정부의 참모습이었다.

이처럼 부르주아들은 적당한 수준에서 혁명을 멈추고 싶었다. 특히 부르주아 정치가 중 온건파인 지롱드 당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미 혁명의 맛을 본 ‘상 퀼로트’들은 거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왕정 폐지와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 향상을 요구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으며 이를 위해 참정권을 원했다.

특히 신변의 위험을 느낀 루이 16세 부처가 오스트리아로 달아다나가 붙잡힌 ‘바렌 도피 사건’과 프랑스 왕정 복고를 노리는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의 침공이 활활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지롱드 당이 밀려나고 강경파인 자코뱅 당이 권력을 잡았다. 

자코뱅 당의 당수인 마라는 루이 16세를 체포했으며 결국 1793년 1월 처형했다. “왕을 죽인다”라는 거대한 심리적 저항선을 넘어서자 자코뱅 당의 폭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효율적인 사형을 위해 단두대를 설치한 뒤 하루도 쉬지 않고 사형을 실시했다. 수많은 왕족, 귀족, 성직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지 약간의 세금을 아까워한 귀족과 성직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그 대가로 치러야 했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는 프랑스 대혁명 초기 혁명에 우호적이었던 귀족들과 같은 부르주아인 지롱드 당 당원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는 자코뱅 당의 ‘공포 정치’가 진짜로 혁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권력 투쟁에 불과했음을 증명한다. 

마라에 이어 권력을 잡았던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실각하면서 겨우 ‘공포 정치’가 막을 내렸다. 다만 자코뱅 당 당원들을 대거 숙청한 것은 지롱드 당도 마찬가지였다. 또 위에서 밝혔듯 지롱드 당이 세운 총재 정부는 자국 시민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대포를 쏘아댔다.

이와 같이 프랑스 대혁명은 결코 자유, 평등, 박애 등 민주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벌어진 혁명이 아니었다. 주된 원인은 돈, 누가 세금을 낼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었다.

다만 일단 붙은 혁명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겉포장 격이었던 수사가 점점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은 전 유럽으로, 이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금을 더 내는 건 싫다”는, 단지 경제적인 의미였던 프랑스 부르주아들의 반발이 민주정의 성립과 정치의 발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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