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음서제 <중> ] 일자리 세습이냐 도의적 역할이냐

단체 협약 고수하는 대기업 노조, "업무상재해 직원 자녀 채용은 도의적 책임"
최근 단체협약 고용세습 조항 사라지는 추세…"선의의 피해자 없도록 해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정된 좋은 일자리를 자손까지 대물림시키는 현대판 음서제인 고용세습이 사라지기는 커녕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악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가뜩이나 취업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고용세습 악폐는 청년들에게  또 한번의 좌절을 안기고 있다. 일부 기업의 단체협약에 조합원 자녀나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지만 정부는 노사 문제라며 수수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파이낸스는 뿌리 깊은 고용세습의 원인과 현황을 들여다보고 해결 방안 등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세계파이낸스=장영일·주형연 기자]  귀족노조로 일컬어지는 일부 대기업 노조들이 단체협약을 통해 고용세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직원 우대 조항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좋은 일자리를 대물림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일부 대기업 노조에는 이같은 내용의 단체협약이 존재한다. 금호타이어, S&T 대우, 태평양밸브공업, 현대자동차, 현대로템, S&T 중공업, 두산건설, 성동 조선해양, TCC 동양, 세원셀론텍, 현대종합금속, 삼영전자, 롯데정밀화학, 부산주공, 두산모트롤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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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등의 단체협약 내용을 보면  '회사는 인력수급계획에 의거 신규채용 시 정년 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 근속자의 직계자녀 1인을 우선 채용한다'고 돼있다.

현대차 계열사인 기아차 역시 올해 노사 간 임금·단체 협상에서 고용 세습 조항을 수정하지 않았다. 올해 임·단협 협상에서 회사측의 '고용 세습' 조항을 삭제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기아차 노조는 단체협약(27조 1항)에 '회사는 신규 채용시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25년 이상) 자녀에 대해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을 명기하고 있다.

사측은 고용부의 시정 권고를 근거로 채용 특혜 폐지를 요구했지만 노조가 거부해 물러섰다고 밝혔다. 현대기아차는 고용노동부로부터 자율시정 권고까지 받았지만 위 조항들을 없애지 않고 계속 유지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단체협약에 위 조항 내용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실제로 이행된 적이 거의  없다"며 "조항 내용이 수정될지는 단협을 거쳐야하기에 확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대차 노조 관계자는 "직원 자녀 우선채용은 노사가 2011년 단체협약에서 별도로 합의했지만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아 사문화됐다"며 "특히 고용세습 논란 핵심인 생산기술직 일반채용은 2014년 8월 비정규직 특별채용 합의 이후 외부 일반채용 자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조는 "단체협약 제97조에는 조합원이 업무상 사망했거나 6급 이상 장해로 퇴직할 시 직계가족 또는 직계가족 배우자 중 1인을 결격사유가 없는 한 요청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특별채용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그러나 이것도 회사 측이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고용세습과 관련한 조항들이 업무중 장해나 사망한 직원들의 가족 생계를 보장하는 기업의 도의적 역할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성동조선해양과 현대종합금속의 '10년 이상 근속자가 업무외 상병이나 장해로 계속 취업이 불가능하고 생계유지가 곤란할 경우, 생계 지원을 위해 직계 비속 1인을 채용기준에 의거 우선 채용하도록 한다'는 규정이 대표적이다.

성동조선해양 노조 관계자는 "단체협약에 명시돼 있는 '우선채용'은 사회적기업으로서 직원과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을 지기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같은 직원 자녀 우선 채용이 기업의 도의적 역할로서 합당한 것이냐를 놓고 비판이 거세다.

취업 업계 관계자는 "일자리는 급하게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면서 "대물림이 정당화 된다면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직원이 근무중 불의의 사고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경우 직계가족 우선 채용보다는 다른 방법을 통해야 하고 억울하게 기회를 놓치는 선의의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행인 것은 이같은 조항이 사문화되면서 단체협약에서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유 4사는 2015년 GS칼텍스를 시작으로 2016년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지난해 SK이노베이션까지 모두 고용세습 논란을 일으킬만한 조항들을 삭제했다.

SK이노베이션은 작년 9월 임금 및 단체협상 합의안을 통해 기존 단체협약 제24조2항에 있던  '회사는 정년 퇴직자, 상병으로 인한 퇴직자의 직계가족 채용에 있어 자격이 구비됐을시 우선 채용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문구를  정유사 중 마지막으로 삭제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사실상 시행한 적이 없는 사문화된 조항이라 노사 합의하에 삭제했다"고 말했다.

에쓰오일 관계자도 "이행률이 '제로'였던 조항이라 있으나마나한 사항이었다"며 "노사간 원할하게 합의해 조항을 삭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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