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 살라딘이 예루살렘 시민들 목숨을 살려준 이유는?

무익한 학살보다 수만 디나르의 금품 택해

예루살렘 점령 후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1차 십자군과 달리 살라딘은 시민들을 무사 방면해 오늘날까지 칭송을 받고 있다. 다만 그 주된 이유는 자비심이 아니라 경제적인 손익에 대한 저울질이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함락 후 대부분의 시민들을 학살했다. 여자와 아이까지 남김없이 죽인 탓에 한동안 예루살렘이 ‘유령 도시’처럼 썰렁해질 정도였다.

반면 예루살렘을 탈환한 살라딘은 무고한 시민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는 몸값을 받는 대가로 모든 크리스트교도들을 방면해 서양에서도 ‘관대함의 표상’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이슬람교도 중 한 명이며 그에 대한 전기가 수없이 출간됐다.

하지만 살라딘은 단지 인정이 많거나 관대한 지도자라서 예루살렘 시민들을 무사히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적인 이유를 최우선시한, 냉철한 계산의 결과였다.

◇살라딘, 하틴 전투서 십자군 궤멸

소수민족 쿠르드족 출신인 살라딘은 본래 다마스쿠스의 술탄 누레딘의 부하 중에서도 말단에 불과한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량과 엄청난 운에 힘입어 짧은 기간 사이에 부강한 이집트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우연히 이집트를 정복한 누레딘 군대의 지휘관이 연속으로 사망한 사이 평소 장병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았던 살라딘이 추대 형식을 빌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장악한 것이었다.

그 뒤 격노한 누레딘이 군대를 끌고 와 살라딘과 몇 차례 충돌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은 살라딘의 편이었다. 누레딘이 어이없게 급사하는 바람에 살라딘은 위기를 넘겼으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마침내 그는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모두 지배하는 이슬람의 유력한 술탄이 됐다. 이슬람교의 이맘(성직자)들을 우대해 종교적인 권위까지 얻었다.

살라딘은 그 다음 목표로 예루살렘 왕국 등 십자군 세력을 노렸다. 오랫동안 이슬람교도의 땅이었던 중근동 일부를 점거한 크리스트교 세력은 확실히 그들에게 ‘목의 가시’였다. 특히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게도 중요한 성지라 반드시 탈환할 필요가 있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와 여러 차례 격돌했다. 살라딘 못지않게 보두앵 4세도 명군이라 한동안은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하지만 보두앵 4세는 하필 나병 환자란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살라딘은 천천히 기회를 기다렸다. 나병이 온몸에 퍼지면서 마침내 보두앵 4세가 사망하자 살라딘은 즉시 대군을 일으켰다.

서기 1187년 살라딘은 지하드(성전)을 선언하고 4만명의 대군을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새로운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은 미남자란 점 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어 살라딘에게 전혀 두렵지 않은 상대였다.

실제로 뤼지냥은 1만8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이를 잘 통솔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물을 지참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막 한가운데로 진격한 것이 치명타였다.

적의 무모함을 이용한 살라딘은 갈릴리 호 근처의 하틴에서 십자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십자군은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하루가 지나자 물이 없는 십자군 장병들은 갈증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음날 이슬람 군대의 총공세에 십자군은 철저하게 궤멸당했다.

총 1만8000명의 군사 중 1만여명이 전사했다.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겨우 3000여명뿐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승이었다. 단 한 번의 승리로 중근동 십자군 세력의 병력 대부분을 소멸시킨 살라딘은 곧바로 갈릴리 지방을 평정한 뒤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방어 지휘관은 이벨린 영지의 영주이자 보두앵 4세의 최측근이었던 발리앙 이벨린이었다. 그는 훈련된 병사가 겨우 60명뿐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9월 21일에 시작된 공방전의 추는 열흘도 지나기 전에 완전히 살라딘 쪽으로 기울었다. 이벨린은 살라딘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예루살렘 시민들의 목숨을 살린 3만디나르 

이벨린은 살라딘을 만나자 처음에는 협박했다. 그는 성이 함락되는 순간 시내에 거주 중인 5000명의 이슬람교도를 모조리 죽일 것이며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사원 등 이슬람의 성지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남은 것은 시체와 불에 탄 폐허뿐일 거라고 강조했다. 

살라딘 등 이슬람군 상층부들의 기분이 서늘해졌다. 그 공포가 지나간 뒤 이벨린은 이번에는 돈을 제시하면서 살라딘을 설득했다. 그는 십자군 점령 시처럼 시민 모두가 성난 이슬람 군대의 칼에 학살당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행운의 여신의 도움이었는지 당시 예루살렘 왕궁에는 영국 왕 헨리 2세가 성지 방어 자금으로 보낸 3만디나르의 금품이 있었다. 이벨린은 그 돈을 모두 줄 테니 예루살렘 시민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시기 예루살렘의 거주자 수는 약 6만명이었다. 이 중 유럽에서 온 크리스트교도, 즉 카톨릭교도가 약 1만5000명, 본래 중근동에서 살던 그리스정교도와 유대교도가 약 4만명, 이슬람교도가 약 5000명으로 추정된다.

이벨린이 안전한 퇴거를 부탁한 대상은 약 1만5000명의 카롤릭교도였다. 이슬람교도가 같은 신도들을 죽일 리는 없다. 또 그리스정교도와 유대교도는 살라딘 치하에서 지즈야(이교도세)를 내면서 계속 예루살렘에 살 테니 자연히 제외된 것이다.

살라딘은 고민 끝에 성인 남성 1인당 10디나르, 여성 1인당 5디나르, 아이 1인당 1디나르의 몸값을 요구했다. 그 시기 기준으로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정당한 수준으로 평가되는 몸값이었다.

다만 그대로 계산할 경우 3만디나르로도 한참 모자랐다. 절반도 채 안되는 7000여명 수준의 몸값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벨린은 바로 찬성했다. 그는 공금이 모자라자 예루살렘 시민들, 특히 부자들에게 사재를 털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벨린이 스스로 500명분의 몸값을 마련하고 예루살렘 대주교가 교회 재산을 총동원해 700명분의 몸값을 지불하는 등 저마다 사재를 기꺼이 내놓았다.

그래도 부족한 돈은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이 1000명분의 몸값을 내놓고 살라딘이 노인들의 몸값을 면제해주는 등 호의를 베풀어 마무리됐다.

덕분에 1만5000명의 카톨릭교도들은 무사히 예루살렘을 벗어나 티루스 등 근처 도시로 피난할 수 있었다. 물론 예루살렘을 비롯해 근처 영지 대부분은 살라딘의 지배하로 편입됐다.

살라딘의 관대한 처분은 1차 십자군의 비인간적인 학살과 비교돼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조치로 칭송받고 있다.

하지만 사실 살라딘의 입장에서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손익을 비교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수천의 이슬람교도들을 시체로 만들어가면서 완전히 파괴된 도시를 재건해야 하는 어려움과 1만5000명의 전력상 위협이 안 되는 서민들을 풀어주는 대신 수만 디나르의 금품과 멀쩡한 도시를 손에 넣는 것은 후자 훨씬 이익이다. 살라딘은 그 점을 냉정하게 계산한 것일 뿐, 이교도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운 좋게도 마침 예루살렘 왕궁에 3만디나르라는 막대한 금품이 없었다면 예루살렘 시민들이 무사히 살아나올 수 있었을까? 아무리 살라딘이 관대한 신사라고 해도 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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