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돈을 노린 날조에 희생된 템플 기사단

십자군 전쟁서 활약한 템플 기사단…아크레 함락 후에도 새 원정 주장
프랑스 왕, 템플 기사단 재산 ‘눈독’…날조된 이단 재판으로 기사단 말살

십자군 전쟁에서 탄생한 종교 기사단 중 1호인 템플 기사단은 이슬람교도와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재산을 노린 프랑스 왕 필리스 4세가 날조한 이단 재판에 의해 템플 기사단은 말살당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템플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당시 태어난 종교 기사단 중 1호 기사단이다. 광신적일 만큼 이슬람교도와 맹렬하게 싸운 기사단으로 유명하다.

또 ‘기사도의 나라’라는 별칭답게 프랑스는 유럽의 여러 나라 중 가장 십자군 원정에 열성적인 나라였다. 1차 십자군과 4차 십자군은 프랑스 귀족들 중심으로 구성됐으며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혼자 힘으로 두 차례 십자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템플 기사단의 구성원도 절대 다수가 프랑스인이었다.

그런데 그 프랑스 왕이 템플 기사단을 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심지어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단 재판까지 날조했다.

이유는 단지 돈, 템플 기사단의 재산을 노린 범죄행위였다.

◇템플 기사단의 탄생과 활약

서기 1099년 1차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해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 뒤 십자군 세력은 예루살렘 왕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등 여러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해안 일대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은 온통 이슬람교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성지라 반드시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했다. 이후 약 200년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지속적으로 십자군 세력을 공격했다.

이들과 맞서 싸우면서 십자군 국가들은 무엇보다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렸다. 성지 탈환이라는 목적 달성 후 대부분의 십자군이 유럽으로 귀환한 탓에 정작 중근동에 남은 병력은 얼마 되지 않은 탓이었다. 

몇십 년에 한 번씩 유럽에서 대규모 십자군 원정이 조직되긴 했으나 십자군 국가 입장에서 이들은 그저 철새처럼 한 번에 몰려왔다가 한 번에 떠나버리는, 의미 없는 병력이었다.

대규모 십자군 원정 사이사이에도 이슬람교도와 십자군 국가들은 거듭해서 전쟁의 불꽃을 튀겼다. 따라서 중근동에 꾸준히 남아 이슬람교도들과 맞서 싸워줄 병력이 절실한데 그런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처럼 병력 부족에 허덕이던 십자군 국가에 등장한 구원의 손길이 종교 기사단이었다.

1118년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 앞에 프랑스의 귀족 위그 드 파양스가 나타났다. 파양스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기사 9명과 함께 종교 기사단을 결성, 순례자들을 보호하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에 기뻐한 수많은 유럽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다. 하지만 이슬람교도들한테 그들은 가증스러운 침략자일 뿐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중근동의 십자군 병력과 싸우는 한편 따로 병력을 보내 순례자들을 습격했다. 순례자들은 거의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쉬운 먹잇감인 데다가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재미까지 있어서 더 열중했다.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예루살렘 왕의 책무였지만, 보두앵 2세는 도저히 거기에까지 돌릴 병력이 없었다. 군사 부족으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보두앵 2세에게 파양스의 제안은 구름 속에서 태양이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었다.

보두앵 2세는 즉시 종교 기사단의 설립을 허가한 것은 물론 그들에게 이슬람의 알 아크사 사원 터까지 하사했다. 파양스는 이곳에 기사단의 본부를 두었다. 이후 그들은 이슬람의 성전에 자리한 기사단이란 뜻에서 템플(성전) 기사단이라 불리게 된다.

종교 기사단의 단원은 모두 수도사들이며 로마 교황의 직속이다. 즉, 어떤 왕이나 제후 혹은 주교의 휘하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수도원과 비슷한데 무장을 하고 이교도와 싸운다는 점이 큰 차이였다.

이후 템플 기사단의 성립에 자극받아 성 요한 기사단, 튜튼 기사단, 성 토마스 기사단 등 여러 종교 기사단이 탄생하게 된다.

1호 종교 기사단의 자부심을 지닌 템플 기사단은 순례자들 보호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왕의 지휘하에 이슬람교도와의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교도는 보는 즉시 죽인다”는 잔인한 회칙을 내걸 정도로 광신도들이었지만 그런 만큼 전장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그들의 활약상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입단 지원자와 기부금이 몰려들어 세력은 점점 더 커졌다.

병력과 자금력이 충실해지자 그들은 예루살렘 왕령에 수많은 성채를 지어 영토를 확장했다. 크고 튼튼한 성채는 공성전에 취약한 이슬람 군대의 약점을 찔러 예루살렘 왕령을 지켜내는데 크게 공헌했다.

템플 기사단은 엉뚱하게 비잔틴 제국을 공략한 4차 십자군만 제외하고 2차부터 7차까지 모든 십자군에 참여해 싸웠다. 그들은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현지 사정에 밝았기에 언제나 주력으로 대접받았다. 제일 위험한 곳, 제일 어려운 싸움에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템플 기사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십자군이 오지 않는 시기에도 이슬람 군대와 싸우지 않은 날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쉴 새 없이 전투를 치렀다. ‘산의 노인’이 이끄는 암살자 조직 어새신을 습격해 거의 궤멸시키기도 했다.

템플 기사단의 용맹함과 공적은 같은 종교 기사단 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이슬람교도들이 가장 증오하면서도 또한 가장 두려워한 전투 집단이 템플 기사단이었다.

◇재산 노린 프랑스 왕에게 말살된 템플 기사단

그러나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템플 기사단도 십자군 시대가 끝나면서 저물게 된다.

서기 1291년 맘루크 왕조의 이슬람군이 중근동에 남은 십자군 최후의 근거지 아크레를 점령하면서 십자군 세력은 완전히 소멸됐다. 자연히 템플 기사단도 존재 의의를 잃어버렸다.

살아남은 템플 기사단원들은 일단 프랑스로 돌아갔다. 프랑스는 십자군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국가였다.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홀로 6차 및 7차 십자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기실 템플 기사단원도 대부분 프랑스인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왕을 설득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필리프 4세는 할아버지 루이 9세와는 달리 십자군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가 흥미를 가진 유일한 분야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필리프 4세가 볼 때 템플 기사단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이 거치적거리는 무리에게서 단 하나의 효용 가치를 발견했다. 이것이 템플 기사단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1307년 프랑스 전역에서 수백 명의 템플 기사단원들이 한꺼번에 체포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필리프 4세는 그들이 신을 거역한 죄를 저질렀다며 이단 재판소에 넘겼다.

이단 재판소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한 끝에 확정된 템플 기사단원들의 이단죄는 무려 127가지에 달했다. 악마 숭배, 십자가에 침 뱉기, 남색, 횡령 등 죄목은 실로 다양했다.

더 황당한 것은 템플 기사단의 죄목 중에 성지를 이슬람교도에게 팔아넘긴 죄도 포함됐다는 점이다. 약 200년 동안 중근동에 2만 명의 시체를 늘어놓은 템플 기사단이 성지를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는 세 살 바기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야 어쨌든 최고 권력자가 원하는 그대로 사건이 조작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당시 ‘아비뇽 유수’에 의해 프랑스 왕의 포로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로마 교황 클레멘스 5세도 “템플 기사단은 이단”이라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크리스트교의 영웅이 한 순간에 ‘악마의 무리’로 둔갑한 것이다. 기사들 대부분은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1314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필리프 4세는 왜 이렇게까지 엉터리 죄상을 날조해 템플 기사단을 말살시키는 악랄한 짓을 저질렀을까. 놀랍게도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이었다.

필리프 4세의 할아버지인 루이 9세는 6차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교도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몸값을 내고 풀려나는 과정에서 템플 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졌다. 할아버지의 빚은 아버지를 거쳐 손자에게 전가됐지만 필리프 4세는 이 빚을 갚기 싫었다.

아울러 템플 기사단은 오랫동안 많은 신자들로부터 기부를 받은 덕에 한 나라의 왕도 부럽지 않을 만큼 거대한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수북이 쌓인 금화와 은화는 물론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 소유한 부동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필리프 4세는 그 재산을 탐낸 것이었다. 실제로 이단 재판 후 템플 기사단이 프랑스 내에 소유한 모든 재산은 프랑스 왕가의 소유로 몰수됐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이단 재판은 필리프 4세의 탐욕에 의해 아무 증거도 없이 날조된 재판으로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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