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메모]관치를 욕하며 관치를 원하는 사람들

관치에 기대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 갖춰야

안재성 세계파이낸스 기자.
‘세월호 사태’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관치에 대한 혐오감이 부쩍 강해졌다. 금융도 예외는 아니어서 관치금융이 적폐의 상징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에 따라 공직자윤리법 개정을 통해 금융당국 출신들의 재취업을 대폭 제한하는 등 관치금융을 걷어내려는 시도가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다소 모순되는 것은 그렇게 관치를 욕하던 사람들이 막상 자신들이 필요로 할 때는 서슴없이 관치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최근 금융감독원 건물 앞에서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환우 모임' 등 암환자들 및 관계자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지고 있다.

암보험에는 병원 입원일당을 지급하는 특약이 있다. 그런데 보험사들이 직접적인 암 치료 목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암환자의 요양병원 입원은 입원일단 지급 대상에서 제외해버리자 암환자들이 반발한 것이다. 

여기서 의아한 부분은 암환자들이 보험사 건물 앞이 아니라 금감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금감원이 보험사의 횡포를 방임한다”면서 “내 보험금이 지급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결국 금융당국이 보험사들을 압박해서 보험사들이 암환자의 요양병원 입원에 대해서도 입원일당을 지급하게 만들어달라는 뜻이다.

물론 이해는 간다. 보험사들에게도 민원을 제기해봤지만 들어주지 않으니 금융당국이 나서서 해결해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관치금융의 한 단면으로 봐야 한다.  보험사의 행태가 석연치 않다면 절차를 밟아 민원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걸어야 한다. 관의 권력으로 보험사들을 압박해달라는 것은 나를 위해 관치를 행하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관치를 욕하면서 관치를 원하는 모습은 종종 보인다. ‘삼성증권 사태’와 관련해 금융당국은 삼성증권에게 신속하고 차질없는 피해자 구제를 주문했다.

사실 이것 역시 관치다. 금융당국의 역할은 삼성증권에 대한 제재 및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지, 피해자 구제의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삼성증권의 피해주주들은 관치를 문제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금융당국에게 더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금감원 건물 앞에서 시위하면서 배당 오류 및 유령주식 매도가 일어난 날 주식을 판 주주 외에도 손해를 배상할 것과 삼성증권 영업정지 등을 요구했다.

지금은 해결됐지만 한국지엠 철수 논란이 한창일 때는 한국지엠 노동조합까지 금감원 건물 앞에서 철야농성을 펼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청와대 청원의 대부분은 대통령의 권력을 활용해 내 민원을 해결해달라는, 내가 바라는 바를 이뤄달라는 요청이라고 한다. 청와대 청원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광경이다.

내가 지금 몹시 억울하고 답답할 때 권력자의 권력으로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면 확실히 통쾌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제 정치의 특징이지, 민주 사회에서는 지양해야 할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지금 답답하고 힘들더라도 절차를 밟아 공식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통해 해결을 꾀해야 한다. 법규가 잘못된 것 같으면 국회의원에게 연락해 법규 개정을 요구해야 한다. 일반 시민들이 국회의원과 소통할 통로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

시위를 하더라도 해당 기업 등 당사자 건물 앞에서 해야지, 관의 권력을 활용해 ‘나쁜 기업’을 압박하겠다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다. 관치는 내가 필요할 때만 활용하는 요술 지팡이가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의 경험으로 깨달았듯 관치는 언제나, 비록 나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배격해야 한다. 관치에 기대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뿌리내릴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민주 사회로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egye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