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땡전 한 푼 없다”의 유래는?

흥선대원군, 당백전 발행…인플레이션 등 경제혼란 유발
아무도 안 쓰는 당백전…“당전 한 푼 없다” 용어 생겨나

흥선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으로 세도 정치 등 조선말의 폐단을 혁파했으나 쇄국 정책 등 실기도 저질렀다. 특히 당백전 발행은 소득 없이 국가경제와 백성들에게 큰 피해만 안겼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땡전 한 푼 없다”는 용어는 무일푼이란 뜻으로 종종 쓰인다. 여기서 ‘땡전’이란 흥선대원군이 발행한 당백전을 뜻한다. 본래 상평통보 100닢에 해당하는 가치였던 당백전이 그만큼 가치 없는 돈으로 전락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 혁파, 서원 철폐 등 여러 개혁을 실시했지만 동시에 무리한 쇄국 정책을 감행해 개화를 막은 권력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쇄국 정책 못지않게 큰 실책은 경제 분야에서 벌어졌다. 특히 당백전 발행은 아무 소득 없이 백성들만 괴롭히고 국가 경제를 크게 망가뜨렸다. 오늘날까지도 쓰이는 “땡전 한 푼 없다”는 용어가 이를 잘 증명한다.

◇왕권 강화 추구한 흥선대원군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인 흥선군은 서기 19세기 초중반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로 나라와 왕조가 피폐해지는 것을 통감하면서 살았다.

철종 사후 흥선군은 왕실의 제일 어른이자 역시 안동 김문을 몸서리쳐지게 싫어하는 조대비에게 접근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차기 국왕, 고종으로 세우도록 유도했다.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로서 흥선대원군이 됐다.

고종의 나이가 12세로 아직 어리기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조대비는 국정 운영을 흥선대원군에게 맡겼다.

파락호를 자처하면서 안동 김씨의 견제를 피하다가 드디어 권력을 쥔 흥선대원군은 그간 꿈만 꾸던 개혁 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추진한 개혁의 주 목적은 세도 정치 척결 및 왕권 강화였다.

우선 그간 정권을 농락하던 세도가 안동 김씨가 대부분 조정에서 밀려났다. 대신 안동 김씨와 사이가 나쁜 풍양 조씨나 남인 세력을 등용했다. 또 지나치게 비대해진 비변사를 폐지해 왕의 권한을 늘렸다.

흥선대원군은 붕당의 근간이자 백성들을 괴롭혀온 서원도 적극적으로 철폐했다. 전국적으로 수천 개의 서원이 철폐돼 겨우 47개만 남게 됐다. 아울러 군포제를 호포제로 바꾸고 양반에게도 호포를 걷었다.

흥선대원군의 여러 개혁으로 그간 허수아비 수준이던 왕권이 강화되고 일부 세도가에게만 모든 권력이 집중되던 세도 정치가 혁파됐다. 국가 재정이나 백성들의 삶도 일정 부분 나아졌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왕족이었다. 그의 개혁은 나라를 살찌우기보다 신권 경제 및 왕권 강화에만 치우쳤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 대부분이 그러하듯 흥선대원군도 유학과 정치에는 능해도 경제 쪽으로 문외한이었다. 그의 잘못된 경제 정책은 쇄국 정책 이상으로 국가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경복궁 중건 자금 마련 위해 당백전 발행

흥선대원군은 1865년부터 경복궁 중건에 나섰다. 경복궁은 조선 초기 국왕이 거주하던 최중요 궁전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졌다. 이후 병자호란을 겪고 세도 정치가 횡행하는 등 국가 재정이 좋지 않다보니 재건이 거듭해서 연기된 상태였다.

왕실의 건재함을 널리 알리는 상징으로써 경복궁을 중건해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 흥선대원군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직 세도 정치의 폐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복궁처럼 큰 궁전을 재건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공사에 착수한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재정절벽에 부딪혔다.

흥선대원군은 한성의 사대문 통과 시에 세금을 걷는 등 일부 증세를 추진했음에도 돈이 부족하자 1866년 당백전을 발행하기로 했다. 당백전은 흔히 엽전으로 불리는 당시의 화폐 상평통보 100닢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새로운 화폐였다.

유럽의 군주들이 재정 부족에 처하자 지폐를 발행한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다만 지폐는 언제든 액면가만큼의 금화와 바꿔준다는 약속하에 발행됐다. 그것이 사기일지라도 최소한 발행 초기에 지폐가 시장에 먹힌 것은 그런 약속 덕분이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아무런 기초자산 없이 무조건 “당백전은 상평통보 100닢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다”는 포고령만 냈을 뿐이었다. 왕의 명령에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절대권력을 지향하면서 경제에는 문외한인 동양의 군주다운 모습이었다.

따라서 당백전은 처음부터 시장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백전은 상평통보 100닢이 아니라 고작 5~6닢의 가치로 거래됐다. 그리고 지나치게 액면가가 큰 화폐의 등장 탓에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으며 조선의 경제는 망가졌다. 백성들의 삶도 심히 피폐해졌다.

백성들의 원성이 어찌나 컸던지, 흥선대원군도 발행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당백전의 주조를 멈출 정도였다. 그리고 발행 2년만인 1868년 당백전의 통용을 중지했다.

사실 공식적인 통용 중지가 그 때였을 뿐, 일반 상거래에서는 그 한참 전부터 당백전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당백전은 가장 가치 없는 돈으로 취급됐으며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용을 중지하자 그런 인식은 더 강해졌다.

그런 탓에 언젠가부터 무일푼이란 의미로 “당백전 한 푼 없다”는 용어가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백전은 곧 줄임말인 당전으로 변했고 이어 된소리화되어 땡전으로 변했다.

“땡전 한 푼 없다”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같은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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