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돈이 없어서 무너진 明 동북 방어선

원숭환, 모문룡 처형해 자금 마련…월권행위로 숙청당해
明 병부, 비용 아끼기 위해 속전속결 요구…야전에서 명군 전멸

중국의 만리장성. 산해관을 비롯한 만리장성은 명나라 동북 방어선의 핵심이었다. 원숭환은 이를 더 강화시켜 청군의 위협을 막아냈으나, 자금 부족 탓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만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중국 역사에선 명-청 교체기는 당시 명나라 지도층의 무능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대제국 명나라의 웅혼한 힘을 느끼게 해주는 시기다.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크는 걸 제대로 견제하지 못해 그가 결국 만주족을 통일하도록 허용했다. 이후 탄생한 후금에게 명나라는 지속적으로 어리석은 장면만 연출하면서 밀렸다.

사르후 전투에서는 장군들끼리 공을 다투다가 참패했다. 그 뒤 요동 방어선을 강화해 버티던 웅정필이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당한 탓에 심양, 요양 등 요동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기근과 농민 반란까지 겹쳐 나라 안이 엉망진창이 됐다. 그럼에도 명은 굳건히 버텨냈다.

원숭환이 만리장성의 일부이자 동북방 최요해지인 산해관을 중심으로 새롭게 방어선을 형성한 뒤 만주족은 20년 가까이 이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가 절망한 채 사망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토록 강고하던 명나라의 동북 방어선이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붕괴되고 만다.

◇원숭환이 만든 철벽 

원숭환은 본래 과거에 급제한 문인이었으나 평소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 웅정필이 몰락한 뒤인 서기 1622년 원숭환은 요동을 염탐한 뒤 “군마와 경비만 주면 내가 동북방을 지켜내겠다”고 명나라 조정에 진언했다.

외부의 만주족의 위협과 내부의 농민 반란이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던 명나라 조정은 달리 대안도 없었기에 원숭환에게 수만 군대와 은 20만냥을 내줬다. 원숭환은 이들을 이끌고 산해관 북방으로 나아가 영원에 높이 3장 2척, 넓이 2장의 성벽을 축조했다.

덕분에 명나라는 산해관 북쪽 약 106km 지점에 새로운 방어 거점을 지니게 됐다. 이는 갑옷 위에 철갑을 덧씌운 것 마냥 명나라의 방어력을 크게 상승시켰다.

다만 원숭환은 당시 황제인 천계제의 총애를 받으며 절대권력을 누리던 환관 위충현의 파당이 아니란 점이 약점이었다. 위충현의 일당으로 산해관 방비를 총괄하던 고제는 “각개격파의 우려가 있다”며 산해관 바깥쪽의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이에 원숭환이 거세게 반발하자 기분이 상한 고제는 원숭환의 직속 병력만 빼고 나머지 병력을 모조리 산해관 안쪽으로 철수시켰다. 이제 원숭환은 고작 2만 군사로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후금군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럼에도 원숭환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다. 1626년 후금 태조 누르하치는 16만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군대가 30만이라고 허세를 떨면서 항복을 권했지만 원숭환은 “죽으면 죽었지 항복할 수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는 원숭환의 철저한 대비가 빛을 발했다. 높은 성벽 안에 숨은 명군이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후금군의 뛰어난 기동성도 의미가 없었다.

성벽에 달라붙으면 즉시 원숭환이 특별히 남방에서 구입해 온 포르투갈의 최신형 대포인 홍이포가 불을 뿜었다. 또 화살과 돌도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결국 후금군은 아무런 전과도 거두지 못한 채 수천의 사상자만 남기고 철수한다. 원숭환은 적을 30여리나 추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홍이포의 포격 때문에 누르하치도 큰 부상을 입었다. 누르하치는 “짐은 군사를 일으킨 이래 단 한 번도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는데 영원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원통해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명나라가 만주족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위충현의 파당이 아니었음에도 명나라 조정은 환호했으며 원숭환에게는 엄청난 찬사가 쏟아졌다. 

천계제는 즉시 원숭환을 병부시랑 겸 요동순무로 승진시키고 막대한 재물을 하사해 치하했다. 이 싸움은 흔히 ‘영원성 전투’ 혹은 ‘영원대첩’으로 불린다.

조정의 신뢰와 풍부한 재물을 얻은 원숭한 즉시 동북 방어선을 더 강화하는데 착수했다. 그는 영원성 외에도 금주, 송산 등지에 성채와 요새를 쌓아 상호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처럼 원숭환이 설계한 명나라의 동북방어선은 매우 견고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정벌하는데 성공했지만 영원성은 뚫지 못했다.

1627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빠른 속도로 원숭환을 공략했다. 그러나 원숭환은 조선의 인조나 김경징 따위와는 레벨이 달랐다.

홍타이지가 우선 영원성의 바깥 해자에 해당하는 금주성을 공격하자 원숭환은 재빨리 부하 장수 조대수와 기병 400명을 파견해 금주성을 구원했다. 홍타이지는 영원성의 방어력이 약해졌다고 판단, 군을 돌려 영원성을 공략했다.

하지만 원숭환은 직접 성 위를 뛰어다니며 방어전을 지휘해 청군의 맹공을 이겨냈다. 매년 300문씩 생산되는 홍이포도 청군에 큰 타격을 가했다. 결국 성벽을 넘지 못한 채 무더위에 지친 청군은 스스로 물러났다.

◇원숭환의 몰락

원숭환은 눈부신 업적을 쌓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우선 전형적인 선비 타입인 그는 태도가 오만하고 친화력이 부족해 중앙에 우호적인 세력을 만들지 못했다.

또 그가 만든 방어선은 철벽이라 불러도 될 만큼 탄탄했지만 그만큼 유지비가 많이 들었다. 대기근과 농민 반란에 시달리는 명나라로서는 군비를 계속적으로 지원하기가 힘들었다.

자금 부족에 고민하던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눈독을 들였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동북 방어선에서 육군은 원숭환에게, 수군은 모문룡에게 지휘를 맡겼었다.

조선의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은 상당한 규모의 수군을 이끌고 요동의 청나라를 견제했다. 다만 그는 원숭환과 달리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대청 전쟁의 최일선임을 내세워 조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도 청나라와 싸우기보다는 청나라와의 밀무역에 더 골몰했다. 그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역이 금지된 걸 악용해 밀무역을 장려하면서 중간에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다.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에 여러 가지 요구를 내놓으면서 조선 백성들까지 약탈했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명나라 조정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듬뿍 바쳐서였다. 모문룡은 탐관오리였지만 중앙의 끈은 오히려 원숭환보다 더 튼튼했다.

원숭환은 모문룡같은 탐관오리를 매우 경멸했다. 게다가 그는 막대한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횡령 및 수뢰죄로 체포해 처형하고 그의 재물을 몰수했다. 그는 몰수한 돈으로 동북 방어선 유지에 필요한 군사비를 충당했다. 

모문룡은 대청 전쟁보다 청과의 밀무역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그 돈을 청나라와 진지하게 싸우는 방어선에 투입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원숭환의 판단이 틀린 건 아니었다.

문제는 원숭환이 황제도 재상도 아니란 점이었다. 단지 동북 방면의 육군 총사령관에 불과한 그가 같은 직급의, 동북 방면 수군 총사령관을 임의로 처형한 것은 엄연히 월권 행위였다.

동북 방어선에서 원숭환의 존재감에 워낙 컸기에 숭정제는 일단 불문에 붙였지만 깊은 불쾌감과 의심을 품게 됐다. 모문룡이 주던 뇌물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 대신들이 그 의심에 부채질을 했다.

결국 1629년 사건이 터졌다. 원숭환이 지키는 동북 방어선을 뚫기 힘들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이 해 내몽골 지역으로 크게 돌아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기상천외한 우회 전법 덕에 그는 단숨에 명나라 수도 북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원숭환은 휘하 군대를 이끌고 즉시 달려갔다. 300여리를 단숨에 주파한 그는 간신히 청군보다 앞서 북경성 앞에 진을 치는데 성공했다. 이어 10여 차례 교전을 벌여 청군을 물리쳤다.

청렴하고 현명한 명나라 대신과 장군들이 원숭환을 만리장성에 빗대 상찬할 만큼 훌륭한 공적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청군의 등장에 놀란 숭정제는 이 사건으로 원숭환에 대한 의심이 더 깊어졌다. 그는 과거의 월권행위에 더해 적의 우회를 허용한 죄를 물어 원숭환을 체포했다.

수많은 장군과 신하들이 “적이 코앞에 있는데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서는 안된다”며 반대했지만 숭정제는 충언을 무시하고 원숭환을 능지처참시켰다.

◇“돈이 없다”…붕괴된 동북 방어선

원숭환 사후 영원성이 청나라에게 넘어간다. 그래도 동북 방어선은 여전히 건재해 청나라는 이 철벽을 뚫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외적의 거듭된 침략조차 막아낸 철벽이 단지 “돈이 없다”는 한 마디 때문에 허물어진다.

원숭환 이후 동북방어선의 책임을 맡은 자는 계요총독 홍승주였는데 그는 원숭환의 전략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영원성은 빼앗겼지만 금주, 송산, 행주, 탑산 등 4개의 성채로 기각지세를 형성해 탄탄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성을 지키는데 주력하되 적이 한쪽으로 힘을 집중하면 다른 성에서 즉시 이를 구원하는 방식이다.

이 전략은 매우 강력한 수비를 자랑한다. 다만 장기전이 불가피하며 능동적이지 않아 적을 격멸하기는 힘들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명나라 병부에서는 이 점을 집요하게 지적했다. 병부상서 진신갑은 홍승주에게 계속 속전속결을 요구했으며 진신갑이 현장에 파견한 장약기도 잇따라 거짓 승전보를 조정에 올려 홍승주를 압박했다.

진신갑은 속전 주장의 근거로 “소극적인 방어전략에서 탈피해 적을 궤멸시켜야 한다”를 내밀었지만 실상 속내는 돈 때문이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동북방어선 유지를 위해 평시에도 매월 은 40만냥을 지출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평시보다 전비 지출이 급증한다는 것은 군사의 상식이다.

진신갑은 안 그래도 기근 등으로 재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전쟁을 오래 끌 경우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기 힘겨워질까 우려된 나머지 속전속결을 강요한 것이었다.

홍승주는 청군을 상대로 한 야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거듭되는 내외의 압력을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1639년 청군이 다시 금주성을 포위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대군을 이끌고 송산성 밖으로 진격했다.

원숭환처럼 소수의 기병으로 포위군을 괴롭히는 전략이 아니라 13만 전군이 야전을 벌이기 위해 성채 바깥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홍타이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릴 듯 명군을 향해 달려갔다. 행군이 너무 급해 코피까지 나서 주위 신하들이 만류했으나 홍타이지는 “행군의 유리함은 신속에 있다”며 듣지 않았다.

역시나 야전에서는 바람처럼 빠른 청군 기병대를 명군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명군은 13만 병사 중 5만3000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송산성 외 탑산, 행주, 금주 등 다른 성채들도 모조리 함락됐다. 패전 후 조정의 처치에 불만을 품은 홍승주는 청나라에 항복했다.

철통같은 방어선이 단지 돈을 아까워한 관료들 때문에 어이없이 붕괴된 것이다. 이제 명나라에 남은 것은 산해관뿐이었다.

다급해진 명나라 조정은 농민 반란에 투입했던 병력까지 동북방으로 돌려야 했다. 정예병이 모두 산해관으로 몰려가자 거의 고사 직전이던 반란군이 다시 살아났다.

반란군 지휘관 이자성은 명나라 전토를 휩쓴 뒤 마침내 1644년 수도 북경을 점령했다. 아직도 청군이 산해관을 넘지 못한 상태이건만 내부의 반란군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당한 것이다.

명나라 입장에서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정말로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란 점이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이 국고를 열어보니 그곳에는 있는 은은 겨우 40만냥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실의 내탕금, 즉 숭정제의 개인 재산은 은 3700만냥 및 황금 150만냥에 달했다고 한다.

숭정제가 약간의 개인 재산만 내놨어도 동북방어선은 무사했을 것이다. 또 정예병을 계속 반란 진압에 투입시켜 이자성의 반란군을 궤멸시켰을 것이다. 역사가 담천은 “명나라 멸망에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책임이 매우 크다”며 날카롭게 비판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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