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돈 몇 푼에 집착하다 죽음 재촉한 로마 귀족들

귀족들의 지나친 이기심에 로마 평민들 마침내 격노

아우구스투스, 살생부 만들어 귀족과 부유층 대량 학살

고대 로마에서 전차 경기장으로 활용된 콜로세움.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후 로마 공화정은 무너지고 제정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등의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확히는 돈이라 불리는 종이쪽지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그리스의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세스는 스스로 통 속에서 살 만큼 권력과 부에 초연한 삶을 지향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회유하자 “지금 당장 비켜라. 햇볕 쬐는데 방해된다”고 냉소했다.

디오게네스는 당대에도 기인으로 유명했는데, 그만큼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

부자도 돈을 사랑한다. 아니, 그들은 소위 ‘돈맛’을 알기에 더더욱 지극한 애정을 품는다. 100억을 가진 부자가 1억쯤 내놓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듯한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긴 커녕 가난한 사람의 돈 100만원, 10만원을 빼앗으려고 애를 쓴다.

오죽하면 “이 세상의 부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살기에 충분하지만, 부자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는 격언까지 존재하겠는가. 예수 크리스트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며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비판했었다.

이처럼 부자의 돈에 대한 집착은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어이없을 만큼 바보같은 판단을 하기도 한다. 장기적인 시야로 볼 때 분명 그들에게 이익인데도 단기적으로 약간의 손해를 보기가 싫어서 우수한 정책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다가 가난한 자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라쿠스 형제를 증오한 로마 귀족들이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돈을 아까워한 귀족들에게 참살당한 그라쿠스 형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로 떠오른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강국 중 마케도니아와 시리아는 로마군에게 패했으며 이집트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다만 동등한 위치의 동맹은 아니었고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너무 짧은 시간 내에 영토와 부가 급격히 커지다보니 ‘성장통’이 찾아온다. 대표적인 것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었는데, 특히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국유지의 편법 임차였다.

로마는 패자에게 몰수한 땅 등 방대한 국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140년 당시 로마의 국유지는 140만헥타르(로마 영토의 7분의 1)에 달했다고 한다.

로마는 이 국유지를 농민들에게 싸게 빌려줬다. 일종의 자영농 육성책이다. 두꺼운 중산층을 형성해 사회의 구조를 튼튼히 하는 동시에 이들을 징집해 병력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자영농 육성책이기에 1인당 국유지 임차 한도는 500유겔룸(125헥타르)로 제한됐다. 그런데 돈 욕심에 눈이 먼 로마 귀족들이 이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그들은 차명으로 국유지 임차권을 마구 사들였다. 임대료가 매우 저렴했기에 귀족들은 막대한 이익을 올렸지만 대신 다수의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만다.

로마의 자영농은 무너졌다. 이는 곧 극심한 사회불안과 군사력 약화로 연결됐다. 모든 로마 시민은 병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무산자)는 병역이 면제된다. 즉, 중산층이 붕괴돼 프롤레타리아가 늘어날수록 병력 자원이 부족해진다는 뜻이다.

기원전 134년 호민관 선거에 당선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세계의 패권자가 된 로마 시민들에게 남은 것은 흙 한 줌”뿐이라며 이 문제를 해결할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라쿠스는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귀족들이 편법으로 임차한 국유지를 몰수하고 이를 빈자들에게 다시 나눠줘 자영농을 육성하자는 정책이었다.

자영농 육성책은 ‘부익부 빈익빈’을 완화시켜 사회 불안을 감소시키고 병력 자원을 늘려 군사력 강화에도 효과가 좋다.

이는 장기적으로 부자에게도 이로운 정책이다. 극심한 사회불안은 혁명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혁명의 첫번째 표적은 언제나 부자다. 국방력이 약해져 전쟁에 패할 경우 역시 부자의 재산은 전부 약탈당한다. 즉, 국가와 사회가 건강해야 부자의 지위도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 귀족들은 당장의 국유지 임차권을 잃는 것이 싫어서 그라쿠스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국유지일 뿐이고 그들은 국유지 외에도 막대한 사유지를 따로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 손해 보는 재산은 별로 크지 않았음에도 부자들의 반대는 몹시 격렬했다. 그들은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그라쿠스의 인기가 매우 높아 정면으로 공격하기 힘들자 대신 그를 ‘포퓰리즘’이라고 몰아쳤다. 나아가 그라쿠스가 왕위를 노린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로마 귀족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위를 노리는 반역자를 처단해야 된다면서 스스로 들고 일어났다. 당시 최고 제사장 나시카를 필두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달려가 그를 때려죽이고 시체는 테베레 강에 버렸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기원전 124년 호민관이 돼 형의 정책을 이어받으려 했을 때도 귀족들의 반발은 마찬가지였다. 가이우스가 형처럼 되지 않기 위해 지지자들을 일종의 호위병처럼 활용해 자신을 보호하자 이번에는 용병까지 동원했다.

기원전 122년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눔(원로원 최종 권고)’에 따라 대군을 동원했다. 주로 마케도니아 출신 중무장 보병과 크레타 출신 궁병으로 이뤄진 용병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가이우스를 비롯해 수천명의 지지자들이 반역죄로 체포돼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닌, 100억 재산가가 1억만 내놓으면 되는 국유지 임차권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이기심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지독한 이기심은 그들에게도 결코 이롭지 않았다. 단지 몇 푼의 돈을 아까워한 그들의 행위는 자신과 후손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내 재산만 지키면 돼!”…마리우스의 군제개혁에 찬성한 귀족들

기원전 107년의 로마 집정관으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선출됐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로 한 세대가 지난 후였지만 로마 사회의 병폐인 ‘부익부 빈익빈’과 ‘국유지 편법 임차’는 아직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때였다.

마리우스는 로마 정계에서 ‘변방 중의 변방’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한 평민일 뿐 아니라 로마 시 출신도 아니었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꽤 가난한 소도시인 아르피노 태생이었다.

다만 그는 군사적 재능 하나는 압권이었다. 여러 전장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혈통 덕에 쉽게 사령관 자리를 차지했지만 막상 전쟁 지휘에는 자신이 별로 없는 귀족들이 실질적인 지휘권을 위임할 인물로 종종 마리우스를 찾곤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로마는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치렀기에 군사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매우 컸다.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재능으로 군사적 재능이 꼽힐 정도였다.

로마의 집정관은 곧 로마군 최고사령관이다. 그리고 사령관의 능력이 우수할수록 전쟁터에서 죽는 병사 수도 감소한다. 유권자이자 병사인 로마 시민들이 집정관의 군사적 재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덕분에 마리우스는 그 무수한 전공만으로도 인기가 매우 높았다. 뿐만 아니라 마리우스는 교양과 학식은 부족했지만 정치적인 재능은 꽤 뛰어난 인물이었다.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에 보다 더 공헌한 사람이 보다 더 고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명문 귀족들은 나를 족보도 없는 천민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은 대체 무엇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전쟁에 관한 한 그들의 지식은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글로 읽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직접 체험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상속받은 명성을 더럽히기보다는 스스로 명성을 쌓아올리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마리우스가 집정관 당선 후 한 연설에서 발췌한 문장인데 듣기만 해도 감동으로 가슴이 떨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 민중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는 정치가들은 바닷가 모래알처럼 수두룩하지만 그들 중 마리우스만큼 빼어난 선동가가 대체 몇이나 될까?

그는 그라쿠스 형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포퓰리스트’였다. 최소한 그의 주위에 있는 참모진의 정치적 역량은 극히 우수했다.

그런 만큼 마리우스는 민중을 선동하면서도 도를 지킬 줄 알았다. 명문 귀족 메텔루스가 49세의 마리우스에게 “네가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다고? 설령 집정관이 된다 해도 여기 있는 내 아들과 비슷한 시기에나 될 걸?”이라고 20세의 아들을 가리키면서 조롱할 정도로 미천한 출신의 마리우스다.

그가 집정관 선거에 당선된 것은 순전히 귀족들의 지나친 이기심에 대한 로마 평민들의 분노 때문이었다. 그라쿠스 형제를 반역자로 몰아 처단한 뒤에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으면 좋았겠지만 로마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돈을 버는 것에 만족할 뿐, 사회불안과 국방력 약화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이어갔다.

그 결과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 로마의 군사력은 깜짝 놀랄 만큼 허약해졌다. 집정관 카토는 트라키아에게 패했고 집정관 카르보네스는 게르만족에게 패했다. 북아프리카로 원정한 로마군은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의 군대에 포위당해 자진 무장해제 뒤 쫓겨나는 치욕을 겪었다.

자연히 로마 시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급등했다. 시민들이 기존 정치가들을 불신할수록 ‘새 얼굴’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마리우스는 딱 그들이 원하는 타입의 ‘새 얼굴’이었다. 기존 권력 구도에서 변방에 해당하지만, 능력만은 출중한.

다만 신진 세력일수록 조직력이 취약하며 ‘시민의 열광’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이를 잘 아는 마리우스는 시민들을 선동해 권력을 손아귀에 쥐었지만 적당한 수준에서 기득권 세력의 비위를 맞춰줬다.

그는 ‘개혁’을 외쳤으나 귀족들이 민감해하는 재산권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군제만 개혁해 기존의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꿨다.

병역을 원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그 의무를 없애버린 모병제는 높은 호평을 받았다.

문제는 모병제 하에서 누가 군대에 지원할까라는 점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병역은 곧 시민의 의무이자 소득세를 대신하는 개념이기에 병사에게 지급하는 급료는 매우 적었다. 현대의 대한민국처럼 터무니없는 푼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잘것없는 돈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지원자 수를 걱정하지 않았으며 일은 그의 예상대로 풀렸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도래하면서 급증한 프롤레타리아들이 대거 군대로 몰려온 덕분이었다.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복지가 충실하지 않았다.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오늘 먹을 빵조차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고 약간의 급료, 현대로 치면 월 100만원 수준의 급료를 지급하는 군대는 충분히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게다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이라는 또 다른 ‘보너스’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귀족들 역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에 찬성했다. 농지개혁이 아니기에, 단지 그들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귀족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근대 이전의 모병제는 군대가 급료를 주는 사령관의 사병화되기 쉽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국가재정에서 그들의 급료가 지불되는 거지만 병사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무식한 병사들은 자신에게 직접 돈을 주는 주체인 사령관에게 충성했다.

로마군 역시 군제개혁 후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 여러 군사령관들의 사병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다툼에 군대가 동원되면서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거듭해서 벌어졌다.

당연히 내전의 승자가 노리는 첫번째 타겟은 상대편 진영의 유력자, 즉 귀족과 부자들이다. 마리우스는 귀족 50명을 비롯해 부유층 1000여명을 처형했다. 술라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를 죽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뒤 관용을 베풀어 반대편을 학살하지 않았지만 그런 자비는 카이사르만의 것이었다.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살생부를 작성해 수백명의 귀족과 수천명의 부유층을 학살했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에 그토록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으면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에 동의한 대가는 처참했다. 푼돈을 아낀 대신 수많은 귀족들이 목숨을 잃고 전 재산을 몰수당해야 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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