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통장 근절도 좋지만…원성 부르는 신규통장 개설

요건 까다로워 창구직원과 승강이 일쑤…일부선 각서도 요구
증빙서류 필요없는 소액계좌제 도입했지만 실효성 의문 지적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에 많이 이용되는 대포통장 근절을 위해 신규 통장 개설요건을 엄격히 하면서 통장 개설과 관련한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통장 개설 요건이 매우 까다로워진 것을 잘 모르는 고객이 은행 창구에서 직원들과 승강이를 벌이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때로는 통장 개설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자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 때문에 다급하게 ''금융거래 한도계좌'' 제도를 도입했지만, 이 역시 실효성이 떨어져 외면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월5일 대포통장 근절 위해 계좌 신규 개설 또는 2000만원 이상 금융거래를 할 때 실제소유자인지 확인하는 것을 의무화 했다.

개인은 성명·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실제 계좌 소유자인지를 대조한다. 법인은 등기부등본이나 주주명부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계좌 소유주는 25% 이상 지분증권 보유자, 임원을 과반수 이상 선임한 주주, 최대지분증권 보유자, 법인 또는 단체의 사실상 지배자·대표자 중 하나의 조건 충족해야 한다. 

이에 맞춰 은행들도 금융사고 예방을 위해 자체적으로 대책을 내놨다. 많은 금융기관들이 자행 또는 타행에서 통장을 개설한 지 한 달 이내에 통장을 다시 개설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만약 한 달 이내에 새롭게 통장을 개설할 경우 통장이용 목적을 증빙할 수 있는 까다로운 서류를 요구한다.
 
얼마 전 부의금을 입금하기 위해 별도 통장을 개설하려던 A씨는 두 금융기관 지점에서 모두 통장 개설을 거절당했다. 한 증권사에서 개인은퇴계좌(IRA)를 만든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A씨는 "통장을 만들려면 사유를 입증할 서류를 갖고 와야 한다고 하는데 ''상을 당한 사람이 어디서 그걸 만들어 오느냐''고 항변해도 창구 직원들은 막무가내로 안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기존 통장에 입금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범죄 예방도 좋지만 선량한 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게 과연 옳은 정책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한 시중은행에서는 증빙서류를 모두 갖춰 계좌를 개설하는 경우  ''대포통장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 회사원 김모씨(45)는 "20년간 거래한 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하는데 대포통장 관련 각서를 쓰게 해 불쾌했다"고 말했다. 

월급통장 등 개설 목적이 분명한데도 소득 증빙이 안 된다는 이유로 통장 개설이 안 된 사례도 있다. 한 시중은행에서 월급통장을 만들려던 박모씨(28)는 "입사 직후라 소득이 없는 상태여서 결국 통장을 만들지 못하고 고등학생 때 만들었던 통장을 월급 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주민등록상 주소와 현재 거주지가 다르거나 회사 근무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개설을 거절당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주소지나 근무지가 다른 이유를 소비자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은행원들도 이로인해 적지않은 고충을 겪고 있다. "예전에는 쉽게 만들어줬는데 지금은 왜 안 만들어주느냐"는 고객들의 항의 때문이다. 한 은행원은 "만들어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윽박지르는 등 서류 없이 계좌 개설해달라는 고객 때문에 애를 많이 먹는다"고 토로했다. 

관련 민원도 증가추세다. 금융감독원 한 관계자는 "통계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신규계좌 개설과 관련해서 민원이 늘어나긴 했다"고 말했다. 

신규계좌 개설과 관련한 민원이 빗발치자 금감원은 지난 3월 ''금융거래 한도계좌''를 도입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융거래 목적과 관련한 증빙 제출이 어려운 고객을 대상으로 금융사별로 1인당 1개의 ''금융거래 한도계좌''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거래 한도계좌는 하루에 인출·이체할 수 있는 금액을 최대 100만원으로 제한한 계좌다. 창구나 자동화기기, 전자금융거래 등 거래 채널에 따라 한도를 제한하는 소액거래 계좌다. 

금융거래 목적에 관한 증빙서류를 제출하지 않아도 금융회사별로 1인당 1계좌 개설이 가능하다. 다만 대포통장 명의인이거나 단기간에 여러 계좌를 개설한 경우에는 계좌 개설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후 증빙자료를 제출하면 정상 한도 계좌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거래 한도계좌의 경우 자동화기기나 인터넷뱅킹으로 이체할 수 있는 금액이 하?30만원으로 제한돼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체 가능액이 30만원으로 제한되다 보니 학생이나 주부들 정도만 만들어간다"고 말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통장 개설을 어렵게 하는 것은 대표적인 금융개혁의 역주행 사례"라며 "대포통장 문제는 대포통장 관련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문제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실제소유자 확인의무화’ 시행 이후 대포통장 건수와 액수 모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이후 증가추세를 보이던 대포통장 건수는 올해 4월 들어 큰 폭 감소세로 전환했다. 4월 월평균 피해금액(117억원) 및 피해건수(3058건)은 지난해 하반기(146억원, 3637건)대비 각각 19.9%, 15.9% 줄었다.

이정화 기자 jh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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