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구조조정 관련 한은에 기대려는 여권의 속내는?

조선·해운업을 시작으로 산업 구조조정이 닻을 올렸지만, 재원 확보 방안을 둘러싸고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해 한국은행이 나서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구조조정 ‘실탄’ 마련에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정부가 신속성을 이유로 국회의 입법이나 동의가 필요한 방법 대신 한은의 지원을 받는 우회로를 찾기 보다 정공법으로 국회를 설득해 재정을 투입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관련 산업을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구조조정이라면 과감하게 재정을 투입해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국회를 설득할 자신이 없으면 해당 기업들을 법정관리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정부와 여당도 이 점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한때 ‘한국판 양적완화’ 로 불렸던 한은 역할론 카드에 집착하는 속내는 뭘까. 정부는 신속성을 이유로 한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다른 정치적 계산은 전혀 없는 것일까?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기업 구조조정 재원을 만들면 그만큼 재정적자가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이는 곧 증세 논쟁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렇잖아도 야당은 구조조정 재원 마련에 재정을 투입하되 법인세를 올리자고 정부와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더구나 16년만의 여소야대 국회다. 그동안 야당의 법인세 세율 환원 요구를 일축해온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 사안을 국회로 가져갈 경우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조선·해운업의 막대한 부실과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책임론도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중앙은행인 한은의 부채는 국가채무로 잡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한은의 지원을 받는 ''우회루트''가 여러모로 부담이 적은데다 신속성이라는 명분도 있어 매력적이다. 정부와 여당이 한목소리로 한은의 협조를 요청하는 데는 이런 정치적 판단이 깔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하지만 한은 입장에서 볼 때는 부담스런 주문이다. 안정적인 통화량 운용은 한은의 막중한 책무다. 물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은은 통화안정증권을 통해 통화량을 적절히 조절한다. 지난해 말 기준 약 477조원 규모의 한은 부채 가운데 통화안정증권 발행(184조3673억원)과 통화안정계정(10조원) 등 통화안정과 관련된 부채항목이 절반에 가깝다.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돈을 찍어내게 되면 시중 통화량이 증가한다. 이를 조정하려면 한은은 통안증권을 발행해야 하고, 이는 한은의 부채로 계상된다. 현재의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는 통화완화정책으로 돈을 풀어댄 한은으로서는 기존의 통안증권 발행분에 더해 부채를 키우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특정 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는 것도 큰 부담이다. 

그런 점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의  “중앙은행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발언이나 윤면식 부총재보가 “구조조정 자금 마련은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고 입장을 밝힌 것은 충분히 수긍할만 하다. 중앙은행의 역할에 충실한 처신으로 평가된다.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칼을 빼든만큼 신속하면서도 과감한 조치로 부작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재정과 통화 정책조합을 하겠다고 밝힌 만큼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한은 등 관계기관들이 모두 모인 ''구조조정 협의체''에서 현명한 재원확충 방안을 도출하리라 기대한다.

다만 그것이 시일이 지체되고 정치공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도외시한 것이라면 또다른 논란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정부와 여당이 결국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한은을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 ''묘수''를 찾기보다 ''정도''에 충실한 것이 때로는 정답일 수 있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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