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국민 세금 수조원 들어가는데도 사과 한마디 없어

4일 오전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던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간부 등이 서울 모처에서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른바 ‘구조조정 협의체’가 첫 회의를 연 것이다.

이들은 철저히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한 후 결과를 간단하게 요약해 발표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금융시장 불안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국책은행 자본확충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6월말까지 그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또 국민 부담을 최소화하고, 자본확충방안은 재정과 통화정책을 모두 동원해 가장 효과적인 조합을 찾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오갔는지 공개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부와 한은이 한동안 벌였던 논란이 봉합되는 모양새다.

회의 직후 언론사 부장단과 오찬간담회를 가진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협의체에 참석한 김용범 금융위 사무처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면서 “한은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임 위원장은 국책은행 재원확충 방법론을 묻는 질문에 ‘한은이 도와주고, 있는데 돈을 받는 입장에서 방법까지 얘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며 한은의 입장을 한껏 배려했다. 자본확충이 필요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을 관장하는 정부 부처의 장으로 한은에 도움을 청하는 위치임을 의식한 발언이다.

기업 구조조정이 시급한 상황에서 공공기관들이 서로 총대를 메지 않겠다고 핑퐁게임을 벌이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불식한 듯해 다행스럽다. 그간의 경위야 어찌됐든 협의체가 순조롭게 출발함으로써 정부의 구조조정이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구조조정 추진과정에 뭔가 빠져 있고, 선후가 바뀐 듯한 느낌이 드는건 무엇 때문일까?

임 위원장은 한은의 역할과 관련해 “신속한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한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산은과 수은의 자본확충은 정부의 몫인데, 이를 실행할 경우 대부분의 방법론이 국회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20대 국회가 여소야대인 상황에서 국회 동의를 받기가 쉽지 않고, 시일을 끌수록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는 만큼 한은이 적극 나서달라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논리이긴 하지만, 정부가 정공법보다는 손쉬운 방법론을 택하려는 듯한 느낌을 주는건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일반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든,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하든 크게 관심을 둘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구조조정 자금을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나서서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고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 재원조달 방안같은 각론을 놓고 옥신각신 하는 것보다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총체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겠지만, 구조조정 조타수 역할을 맡은 금융위도 ''책임론‘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자본확충 대상인 산은과 수은이 금융위 산하기관이기 때문이다. 산은과 수은에만 자구계획 제출을 요구할 게 아니라 금융위 스스로도 반성문을 써야 할 것이다.

정호원 기자 jh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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