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구조조정 역할론'…한은 결국 금고 여나

여권, "정부 출자보다 한은 출자 또는 채권 인수 바람직"
한은법 개정 불가피하나 야당의 반대기류로 전망 불투명

한국은행 본관 전경. 사진=한국은행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재원 조달과 관련해 정부 여당의 시선이 한국은행으로 집중되고 있다.

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간담회에서 새누리당이 총선 때 제기한 ''한국판 양적완화''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힌 이후 여권에서 한국은행이 ''총대''를 메야 한다는 주문이 잇따라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조선업과 해운업 구조조정을 위한 재원 마련과 관련해 정부가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출자하는 방법보다 한국은행이 출자 또는 채권 인수 방식으로 돈을 대는 게 낫다는 요구다. 독립된 통화정책기관인 한은으로서는 고민스런 주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여권의 압박에 한국은행이 답변을 내놓아야 차례이나 일단 신중모드를 취하고 있다. 한은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직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는 등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구조조정 재원 조달 방안은 다음주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와 한국은행,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으로 구성될 태스크포스(TF)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 고민 깊어지는 한은…결국 ''총대'' 메나

27일 청와대 관계자는 한국형 양적완화와 관련해 두가지 방법이 있다면서 " 한은이 산은 채권을 인수하는 방법이 있고, 한은이 직접 출자할 수도 있다. 둘 다 돈을 푸는 것"이라며 직접적으로 한은의 ''협조''를 주문했다. 

그는 전날 박 대통령이 한국판 양적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발언한 것도 두 가지 방법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은이 산업은행 발행채권을 인수하려면 한은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야당이 그 정도는 협조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당 쪽에서도 비슷한 발언이 흘러나왔다. 김종석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장이 연합뉴스에 구조조정 자금과 관련해 "공적자금을 투입하거나 국채를 발행하는 것보다 한은은 발권력을 동원하는 게  국민경제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며 한은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소장은 새누리당의 총선 공약인 한국판 양적완화 공약을 강봉균 전 공동선대위원장과 함께 설계했으며, 20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따라서 다음주 TF가 구성되면 이같은 여권 기류가 전달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은으로서도 구조조정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만큼 이같은 주문을 도외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22일 금융협의회에서 "한국은행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용경색 등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다양한 정책수단을 동원해서 금융시장 불안해소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금융시장 불안''이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구조조정 과정에서 손놓고 있지는 않을 것임을 선언한 상태여서 과연 어느 선까지 나설지가 주목된다. 

현행법상 한은은 영리기업 지분을 소유할 수 없으며, 채권 인수는 국채 또는 정부보증채권만 인수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은이 산은에는 출자할 수 없지만 수출입은행에는 출자할 수  있다. 

만일 한은이 국책은행에 출자한다면 외환위기 이후 16년만이 된다. 한은이 수은에 출자할 수 있는 근거는 수출입은행법 때문이다. 수출입은행법은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수탁기관이 중앙은행에서 출자를 받아온 국제관례에 비춰 수은이 한은에서 출자를 받을 수 있도록 명시했다. 신법 우선적용 원칙에 따라  수은은 한은의 출자를 받을 수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에 한은이 수은에 2000억원을 출자한 선례도 있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직접 인수해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토록 하는 게 골자다. 또 가계부채 문제 해소를 위해 주택금융공사의 주택담보대출(MBS) 증권을 매입하는 방식도 담겨 있다. 이 방식도 한은이 산금채를 인수하려면 한은법 개정이 필요해 야당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주열 총재는 지난 19일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산업은행이 재원을 조달하는 데 어려운 상황은 아니므로, 기업 구조조정을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한은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말해 한은의 산금채 인수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의 양적완화 언급을 계기로 ''한은 역할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은이 기존의 입장만을 고수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은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구체적인 요청이 오면 한국은행이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만일 한은이 일정한 역할에 나선다면 현금 출자와 채권 인수 두가지 방법 가운데 시장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19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4월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사진=세계일보 DB
◇ 한은법 개정 가능할까

한은이 국책은행의 실탄 지원에 나선다면 법률 개정이 불가피하다. 현재 거론되는 자금 지원방안 가운데 법률 개정없이 가능한 것은 한은이 수은에 출자하는 것 밖에 없다. 

현행법상 한은은 수은과 주택금융공사 두 곳에만 출자가 가능하다. 산은에 출자하려면 한국은행법을 고쳐야 한다. 또 한은법 제76조가 한은은 국채와 정부가 보증한 채권에 한해서만 직접 인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법률 개정이 없이는 산금채 인수도 불가능하다.

여권 관계자들은 한은법을 개정해 정면돌파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엄중한 만큼 야당도 협조를 해주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깔려 있다. 

하지만 한국판 양적완화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혀온 야당이 한은법 개정에 동의해줄지는 불투명해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은은 이와 별개로 구조조정에 발권력을 동원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이주열 총재도 지난 19일 금통위 회의 후 “최근의 한국형 양적완화는 구조조정 지원에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사용하는 의미로 일반적인 양적완화와는 분명히 다르다”며 “구조조정을 지원하더라도 법 테두리 내에서, 중앙은행의 기본원칙 안에서 하겠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이같은 언급은 발권력 동원보다는  금리와 통화량 조절, 대출정책 등 중앙은행이 재량권을 갖고 있는 정책수단을 동원해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권이 한은법을 개정하려면 야당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야당은 아직은 부정적 기류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여권이 야당을 얼마나 설득하느냐에 따라 한은법 개정과 함께 구조조정 재원 조달 방안도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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