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英의 깐깐한 계좌개설 절차, 시사점은?

거주지 증명 서류 제출에 사전 인터뷰까지
美 신원도용 사기액 4년새 20% 감소
"국내선 편리성 익숙한 문화 개선 여부가 관건"

국내에서 대포통장을 통한 금융사기가 근절되지 않자 주요 금융선진국처럼 계좌개설 절차를 다소 까다롭게 바꿔 금융사기나 자금세탁 등의 범죄를 막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국내외에서 간편결제, 비대면거래 등 금융생활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에 속도가 붙고 있지만, 금융거래의 첫 과정인 계좌개설 단계 만큼은 철저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자는 얘기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보고받은 국내 대포통장 발생건수(피싱사기 기준)는 4만 4705건이다. 2012년 3만 3496건에 비해 무려 33.5%나 늘었다. 지난해 3월과 5월 각각 신분증 진위확인 통합서비스, 대포통장 의심거래자 예금통장 개설절차 강화 등의 대책을 시행했지만 대포통장 증가세를 막지 못했다. 대포통장 발생의 여러 요인 중 계좌개설 절차가 너무 쉽다는 점이 주요 원인 꼽힌다.

자료=금감원.

국내에선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등 신분증만 제시하면 사실상 계좌를 만들 수 있다. 최근 대포통장에 따른 피해를 막고자 계좌 개설 점포와 거주지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계좌 개설을 신청하면 신청 당일 업무처리가 끝난다. 금융거래 목적확인서 의무화 제도 또한 금융사기를 막을 완벽한 방안은 아니라는 얘기가 많다.

반면 금융선진국에서는 금융거래의 첫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본인 여부를 확인한다. 금융거래를 시작하기 위한 첫 과정인 계좌개설 단계에서부터 사고 여지를 최소화해보자는 판단에서다.

우선 미국의 사례를 보자. 미국에서는 계좌개설시 여권, 운전면허증을 비롯한 거주지 증명이 가능한 서류를 요구한다. 만약 운전면허증에 기재된 주소와 현재 거주지가 다르다면, 전기·가스요금 고지서, 휴대폰 고지서, 아파트 계약서 등 거주지를 증명할 서류를 제시해야 한다. 

금융감독원 서민금융지원국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주민등록번호제도를 통한 본인확인이라는 기본 개념이 있는데, 미국에서는 이 같은 방법으로 실제 계좌 개설 신청자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인지 확인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즉시 계좌를 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좌개설을 위한 상담 과정에서 본인확인 등 1시간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고 약 2주간은 실물통장을 발급하는 대신, 임시직불카드와 임시수표를 발급한다. 7~10일이 지나서야 우편으로 정식 직불카드와 수표를 배송한다. 계좌에 일정금액 이상 잔액을 유지하지 않으면 ''계좌유지 수수료''를 물린다. 대포통장으로 악용하기 위한 계좌개설을 미리 막는 역할을 한다.

영국의 계좌개설 절차는 더 복잡하다. 계좌개설을 위해 사전에 인터뷰 예약을 해야 하고, 인터뷰까지 평균 1주일 가량 대기해야 한다. 신분증 이외에 재직증명서 또는 재학증명서 등을 통해 본인의 신원을 입증해야 한다. 심지어 타은행 거래여부나 타은행 계좌 잔액도 확인한다. 계좌개설 과정에서 1시간 가량 설문을 작성하고 인터뷰를 진행한다. 현금카드와 핀넘버(Pin Number, 개인 비밀번호)는 약 2주 또는 4주 가량이 지나서야 우편으로 발송된다.

이 같은 엄격한 계좌개설 절차가 금융사기 피해를 줄이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재벌린 리서치 전략 연구소는 보고서에서 "미국 내 금융 신원도용에 따른 피해액은 2010년 200억 달러에서 지난해 160억 달러로 줄었다"고 분석했다. 사고 발생건수가 다소 늘었지만 피해액은 20% 줄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핀테크 트렌드 자체가 간편한 것만을 좇자는 식으로 해석돼선 안 된다"며 "계좌개설이 금융활동의 첫 단계인 만큼 해외에서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깐깐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은행 지점장 출신 금융권 인사는 "금융사기의 근원인 대포통장이 계좌개설 과정에서 생길 수 있다는 건 큰 문제"라면서 "예를 들어 급여통장 등의 사유로 계좌를 개설할 경우, 신청자의 근무지에 전화 등의 확인을 통해 실제 근무 여부를 확인하는 식의 본인 확인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파견 근무 경험을 가진 은행권의 한 관계자도 "미국, 영국 등 계좌개설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방식이 금융사고 개연성을 낮출수 있다"며 "다만 신속성, 편리성에 익숙한 국내 금융소비자가 다소 불편한 계좌개설 과정을 감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 말했다.

오현승 기자 hs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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