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폭락의 득과 실②]흔들리는 신흥국…韓경제 '빨간불'

세계 3대 油價 배럴당 60달러 밑…재정유가 '붕괴'
총수출 67%·재정수입 50% 이상 러시아 '직격탄'
러시아 '지불유예'시 韓수출 3%P↓·성장률 0.6%P↓

사진=SK증권 리서치센터
국제유가 폭락이 심상치 않다. 러시아 등 산유국 경제가 흔들리면서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도 유가 하락이 마냥 반갑지만 않은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미국의 셰일오일에 대항해 진입장벽을 치고자 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도 아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미래 에너지시장을 두고 벌이는 패권경쟁 때문에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신흥국들이 부메랑을 맞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배럴당 55.56달러로 전일 대비 0.94달러 떨어졌다. 이는 지난 2009년 5월6일 53.97달러 이후 5년7개월여 만에 최저치다. 배럴당 60달러 선이 무너진 두바이유 가격은 이틀 만에 55달러 선까지 주저앉았다.

같은 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내년 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도 배럴당 56.47달러에 마감했다. 런던 ICE 선물시장의 브렌트유는 60.57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세계 3대 원유 가격은 배럴당 60달러에 겨우 턱걸이한 북해산 브렌트유를 제외하고 모두 산유국의 석유가격이 마지노선인 60달러를 한참 밑돌고 있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국제유가가 10% 하락할 때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0.27% 증가한다는 보고서도 있어 중장기적으로는 유가 하락이 국내경제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면서도 "좋은 일로만 생각됐던 유가 하락이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다른 여파를 미치는 것을 보며 ''패러독스''(역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고 평가했다.
주) 국제유가는 두바이·브렌트·서부텍사스산(WTI) 3개 유종 평균치임. 통상 CDS프리미엄이 400bp를 초과하면 발행한 채권의 차환발행이 안 돼 자본조달이 어려워짐. 자료=블룸버그, 한국석유공사, 현대경제연구원
◆ 러시아 금융 ''불안'' 국가부도…공포전이 가능성↑

이 같은 저유가에 가장 직격탄을 받은 곳은 러시아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총수출의 67%를 차지하고 재정 수입에서 원유 관련 세수가 50%를 넘는다.

18일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내년 연간 국제유가가 60달러 및 30달러까지 떨어지면 러시아의 내년 무역수지는 각각 1470억달러, 2600억달러 감소해 유가 하락으로 무역수지 악화가 예상된다.

여기에 내년 원유 가격이 60달러로 내리면 러시아의 재정수지는 1160억달러, GDP대비 5.5%포인트 줄어들 전망이다. 30달러의 경우에는 2050억달러, GDP대비 9.8%포인트나 축소될 것으로 우려된다.

유가 하락이 실물경기에 즉시 반영되고 국고 수입 감소로 이어지는 구조이지만, 러시아는 미국과의 자존심을 건 싸움에서 물러설 뜻이 아직 없다.

한국시간으로 월요일인 15일 루블화 가치는 달러당 9.3%나 급락했다. 해외 언론은 이날을 러시아의 상징인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빗대 ‘붉은 월요일’이라고 묘사했다. 특히 루블화 가치는 올해 들어서만 58%나 폭락해 반 토막 넘게 빠졌다.

러시아 경제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를 점령한 이후 서방의 경제제재로 외국 자본이 이탈하고 있다. 올 들어 1340억달러(원화 148조원)가 빠져나갔다.

실물경제도 위기여서 유가가 배럴당 60달러를 하회하면 내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4.5%에 그칠 것이라는 러시아중앙은행의 예측마저 나왔다.

게다가 유가하락의 직격탄을 맞아 루블화 가치가 절반 밑으로 폭락하면서 생필품 가격을 자극하고 있다. 화폐가치 하락으로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오르고 정부가 환율 방어에 실패했다는 자국의 비난 여론에도, 미국의 경제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도가 여전히 80%대라며 이번 사태에도 그의 입지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10월말 현재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4286억달러(약 472조원)로 세계 4위다. 현재 외환보유액의 여유는 있지만, 환율 방어로 곳간은 계속 비어가고 유가마저 급락해 이런 위기가 계속될 경우 러시아 금융기관과 거래가 많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금융권의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말 5165억달러에 달했던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올 11월말 4189억달러로 일 년 사이에 약 1000억달러가량 급감했다. 외환보유고는 향후 환율 개입 등으로 감소세가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또 베네수엘라와 인도네시아 등 경제구조가 원유에 많이 의존하는 다른 산유국으로 지금의 위기가 번질 염려도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를 포함한 최근 신흥국들의 상황이 1998년 외환위기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도했다.
자료=금융감독원
◆ 對러시아 등 12개 신흥국 익스포저 12조…금융당국 "예의주시"

러시아를 포함한 주요 12개 신흥국에 대한 국내 금융기관의 익스포저(위험노출액) 총액은 113억3000만달러(원화 12조4000억원)로 집계됐다. 금융권 전체 대외여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1%다.

이 가운데 러시아에 대한 익스포저만 해도 13억6000만달러(1조4704억원)로 전체 대외여신의 1.3%인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지난 9월말 기준 러시아를 비롯해 금융불안 가능성이 제기되는 인도·인도네시아·브라질 등 주요 신흥 12개국의 국내 금융권 익스포저는 113억3000만달러로, 금융권 전체 대외여신 1083억4000만달러의 10.5% 규모다.

주요국별로 살펴보면 인도네시아가 42억4000만달러로 가장 많다. 인도는 26억7000만달러, 브라질 12억8000만달러, 터키 7억5000만달러, 헝가리 4억2000만달러, 칠레 2억6000만달러, 우크라이나 2억4000만달러 등 순이다.

특히 지난 9월말 한국수출입은행·산업은행·우리은행 등 11개 국내 금융기관이 러시아에 제공한 외화대출, 지급보증, 외화유가증권 등 익스포저는 13억6000만달러다. 전체 대외여신의 1.3% 수준이다.

조성래 금융감독원 외환감독국장은 “16개 국내은행의 외화자금시장 동향을 긴급 모니터링한 결과, 만기 차입금 차환이 원활히 이뤄지고 조달금리 수준도 변동이 크지 않는 등 외화자금시장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국내은행들을 대상으로 한 외화유동성 스트레스테스트에서도 은행의 외화유동성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자료=현대경제연구원
◆ 러시아發 금융위기…한국도 안심할 수 없어

이처럼 러시아발(發) 금융위기가 찾아와도 우리 경제가 직접 받는 충격은 크지 않다는 것이 정책당국의 입장이다. 우리나라 수출입에서 러시아의 비중이 2% 남짓인데다, 러시아와 관련된 금융권 대출 등도 1조5000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위기가 채무 지불유예나 불이행 사태로 번지고, 다른 신흥국으로까지 전염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최성근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이 발생할 경우 실물 부문에서는 유럽의 대(對)러시아 수출 감소가 유럽경기 부진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대러시아 및 대유럽 수출이 감소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최 선임연구원은 이어 "금융 부문에서는 취약신흥국으로부터 외국인투자자금이 급격히 회수되면서 신흥국 통화가치 절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반면, 여타 신흥국에 비해 안정적인 한국 금융시장에 외국인투자자금이 유입될 공산이 커 원화 강세를 띠게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가 내년 상반기 지불유예를 선언할 가능성이 크고, 이 경우 우리나라의 수출은 2.9%포인트 줄고 경제성장률이 0.6%포인트나 하락할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최 선임연구원은 "원화 가치가 강세를 띠면서 한국의 수출 경쟁력은 더욱 약화될 것"이라며 "모라토리엄이 되면 외국인투자자금의 국내 유입이 확대될 것으로 보이고, 이로 인해 원화 강세가 나타나면 엔저현상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외 수출 경쟁력은 더욱 약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이 잇따라 국내외 금융시장을 점검한데 이어, 정부는 러시아발 불안이 확산될 경우 비상대책반을 가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금감원은 러시아 경제에 대한 불안심리가 다른 신흥국으로 옮아붙을 경우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이탈할 수 있다고 보고 자금흐름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관련지표를 밀착 점검하기로 했다.

아울러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이 국내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기획재정부, 금융위 등 유관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단기차입 자제, 중장기 차입확대 유도, 외화유동성 일일점검 등 컨틴전시 플랜에 따라 신속 대응할 방침이다.

김진수 금감원 부원장보는 "전체적으로 러시아의 익스포저 비중이 미미해 국내 금융기관에 미치는 직접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파악됐다"며 "다만 무역 및 금융연계가 높은 유로존과 주변 국가로 파급 효과가 확대하는 등 외부전이 가능성이 있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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