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D'의 공포…다시 양적완화 돌입하나

中, 지준율 낮출 것…대출금리 0.5%P 추가인하 예상
ECB, ABS 매입개시…다음달 1조유로 양적완화 논의
"확장예산+기업투자+금리인하, 모든 카드 동원해야"

중국 위안화. 사진=세계일보 DB
"지금 세계경제는 1930년 글로벌 대공황 직후와 유사하다. 앞으로 세계경제가 장기적 침체국면(Secular Stagnation)에 접어들 것이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학교 교수가 최근 글로벌 경기를 전망하면서 한 말이다. 장기정체(Secular Stagnation)란 경기침체와 소득불평등 심화로 세계경제가 만성적 수요부진에 빠진 상태를 뜻한다.

대표적인 케인즈 학파 경제학자인 앨빈 하비 한센이 처음 주창한 이래,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학교 교수와 지난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등이 주장한 이론이다.

이는 세계적인 채권 펀드회사인 핌코의 빌 그로스가 언급한 ''뉴 노멀''(New Normal)보다 더 혹독한 경기침체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권위 있는 석학들의 비관론이 잇따르는 가운데, 세계경제의 수요가 위축되면 우리 수출도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주) 분기평균. 자료=미국 상무부, 일본 내각부, Eurostat, 현대경제연구원
◆ 일본·유럽 이어 중국도 ‘돈 풀기’…디플레와 전면戰

''디플레이션'' 공포가 일본과 유럽에 이어 중국마저 덮쳤다.

지난 21일 중국인민은행은 1년 만기 대출금리를 0.40%포인트 인하한 연 5.60%, 1년 만기 예금금리는 0.25%포인트 내린 2.75%로 각각 하향 조정했다. 예금금리 변동 폭도 기존 1.1배에서 1.2배로 확대했다.

중국의 이번 금리인하는 2012년 7월 이후 28개월 만이다. 중국이 2년4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전격 낮춘 조치에 대해 디플레이션 위험에 선제 대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광대증권(Everbright Securities)은 "선별적 통화완화정책이 실물경제를 부양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전면적 완화에 나선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은애 NH농협증권 연구원은 24일 "향후 중국경제의 상황에 따라 추가 금리인하뿐 아니라 현재 19.5%로 높은 지급준비율 인하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급준비율은 은행이 수취한 예금 중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적립해야 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지준율이 낮아지면 은행대출에 여유가 생겨 기업에 좀 더 많은 자금이 공급될 수 있기 때문에 시중에 돈이 풀리는 효과를 준다.

해외 투자은행들 역시 중국이 추가 금리인하에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JP모건은 "중국이 성장둔화 우려로 적극적 통화완화정책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UBS는 "대출금리를 내년 말까지 0.5%포인트 추가 인하할 것"으로 예측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 21일 자산유동화증권(ABS)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이날 "디플레이션 발생 억제를 위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물가상승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ECB는 다음달 4일 열리는 통화정책회의에서 1조유로(원화 약 1388조원) 규모의 국채 매입 등 추가 양적완화를 논의할 예정이다.

이미 일본은 지난달 31일 추가 양적완화에 들어갔다. 일본중앙은행은 지난달 말 시중자금 공급량을 연간 10조~20조엔(약 95조~190조원) 더 늘리기로 결정했다.

문병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유로존은 디플레이션 악순환에 빠져들 염려가 있는 데다 과거 일본처럼 장기침체 위험성도 크다"며 "우리나라의 대(對)유럽 수출이 빠르게 회복되기 어려우므로 주력 내구재 부문에서의 경쟁력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LG경제연구원
◆ 투자 없는 韓경제…재정정책만으론 한계 있어

우리경제도 저성장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3.5%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이보다 0.2%포인트 높은 3.7%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성장률 전망치는 모두 빗나갈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분기성장률은 1분기 0.9%, 2분기 0.5%, 3분기 0.9%를 각각 기록하고 있다. 연간기준 3.5%를 달성하려면 4분기 최소 1.2% 성장해야 하나, 한국경제는 2012년 1분기 이후 1.2% 이상 성장한 적이 없다. 분기성장률 1%를 넘은 경우도 지난해 2분기(1.0%)와 같은 해 3분기(1.1%) 단 두 차례뿐이다.

LG경제연구원은 "세계교역이 미진한 회복에 머물고 중국경제도 완만한 하향추세를 계속하면서 수출이 경기를 주도하고 내수를 견인하던 예전의 경기상승 메커니즘이 재현되기 힘들며 내수회복도 완만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경제 성장률이 올 3.7%에서 내년 3.9%로 소폭 오르기는 하나, 세계경제 성장률이 같은 기간 3.2%에서 3.4%로 미미하게 높아져 중기적으로 한국경제가 4%대 성장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통화완화 기조가 내년까지 유지될 것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41조원의 재정확대 패키지를 마련했다. 또 내년 예산안에서 총지출을 올해 355조8000억원보다 20조2000억원(5.7%) 늘린 376조원으로 편성했다. 그러나 정부의 확장적 예산편성으로 인한 내년 중 성장률 제고효과는 겨우 0.2%포인트라는 게 한은의 입장이다.

이로 인해 정부의 재정정책에만 의존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장기불황을 헤쳐 나가기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과 병행해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올 3분기 설비투자 증가율은 직전 분기 대비 0.8% 감소했다. 한은은 지난해 설비투자 증가율이 2.7%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실제로는 1.5% 축소되면서 4.2%포인트나 차이가 벌어졌다.

3분기 제조업 GDP도 전분기?비해 0.9% 줄면서 2012년 1분기 이후 11분기 만에 첫 마이너스(-) 성장을 나타냈다. 게다가 GDP의 49%를 책임지는 제조업은 3분기 전(全)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했다.

한국정책금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기업의 설비투자 실적은 전년도인 2012년 131조원과 비교할 때 0.6% 감축된 130조3000억원에 그쳤다. 당초 기업들은 지난해 설비투자 계획을 140조원으로 전년 대비 6.8%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실제실적은 계획보다 무려 6.9% 집행되지 않았다.

우리경제의 돌파구인 고부가가치산업 육성에 필수적인 기술혁신도 뒷걸음치고 있다. 제조업 연구개발(R&D) 투자액은 올해 4조1000억원으로 전체 설비투자 계획인 136조1000억원의 3% 정도에 불과하다.

김용옥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투자증대→고용창출→소득개선→소비증진→시장확대→투자증대''로 이어지는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회복시켜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뒷받침할 수 있는 정책수단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과 함께 기업의 투자확대는 물론, 한은이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해 통화완화정책을 펴는 등 전방위적으로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동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승훈 삼성증권 연구원은 "유럽·일본의 통화완화에 이은 중국의 전격적인 금리인하로 한은이 추가 금리인하에 나설 공산이 커졌다"면서 "인민은행의 금리인하가 위안화 강세 압력 약화로 귀결될 수 있는 환경에서 국내 실물지표의 회복세 미약과 원화 강세 등이 가시화할수록 국내 금융시장이 한은의 추가인하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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